본문
[한경데스크]
교장선생님 氣살리기
김수찬 오피니언부장 ksch@hankyung.com
몇 년 전 영국 연수시절 얘기다. 아이들 입학문제를 알아볼 겸 집 근처 학교를 찾았다. 여름방학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무실도 들렀다. 5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면장갑을 낀 채 땀을 흘리며 학습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고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느냐고 했더니 "학생이름과 주소만 적어놓고 개학식 때 오라"고 했다. 며칠 후 개학식 날 그 아주머니가 교장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교장에 대한 놀라움은 그 후 1년여의 짧은 기간 영국 공교육을 간접 경험하며 몇 차례 이어졌다.
무엇보다 영국 교장은 '에헴'하며 점잔만 빼지 않는다. 솔선수범한다. 학예발표회 때는 아예 '무대감독'을 자처한다. 무대 위 학생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사인을 보내며 노래와 춤을 직접 지도한다. 교장실의 위치에도 놀랐다. 학교건물 입구에 있다. 마치 수위실처럼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는다. 학부모들도 수시로 드나들면서 교장과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가장 놀란 것은 교장의 '권위'다. 아무리 격의없이 지내더라도 선생님과 학부모들은 교장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특히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 가장 무서워하는 벌은 교장과의 면담이다. "너 계속 그러면 교장 선생님께 보낸다"는 경고는 회초리보다 약효가 세다.
이처럼 영국 교장이 학교'어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권한과 책임이 동시에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영국정부가 1998년 발표한 그린북에는 "교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학교발전을 이끌고 학생,학부모는 물론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영국은 학부모가 중심이 된 학교운영위원회가 공채를 통해 교장을 뽑고 그에게 직원 및 교사 인사권과 학교 자율운영권을 준다. 그에 따른 책임도 크다. 기대했던 성과를 못 내면 곧바로 잘릴 수도 있다. 또 능력과 학교재정에 따라 연봉이 크게 차이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마디로 기업 CEO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학교 어른으로서 권위와 위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교조에 휘둘려 교육현장이 파행을 겪어도 일부 교장은 뒷짐만 진 채 정년 날짜만 꼽고 있다. 교육당국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교장에게 교사 전출입권을 대폭 줘 필요한 교사를 데려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전교조의 반발 때문에 없던 일로 해버린 것이다.
| |||
물론 영국의 교육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학교 어른인 교장이 바로 서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우리에게도 교장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꼴찌학교가 일등학교로 바뀐 사례들이 많다. 이런 학교들이 좀더 많이 생겨나 연 20조원의 사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이 바로 설 수 있도록 교장 선생님들의 기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
입력: 2009-03-30 00:22 / 수정: 2009-03-30 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