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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울로 실험을 하며 물리 수업을 받고 있는 1932년 당시 경기여고생들./경운회 제공
지난 1일 오전 서울 개포동 경기여고의 경운박물관 2층 사무실에서 옛날 사진과 신문 기사 스크랩을 들춰 가며 선배들이 들려주는 모교 얘기에, 재학생 후배들은 "정말 그랬어요?"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귀를 기울였다.
국내 엘리트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던 경기여고가 오는 15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경기여고 동문회는 이를 기념해 올해 말 '경기여고 100년사(史)'를 출간하기로 했다. 사료 수집에서부터 집필, 교정까지 2년 넘게 모든 작업을 동문 20여명이 손수 해왔다.
- ▲ 1일 오전 서울 개포동 경기여고의 경운박물관 2층 사무실에서‘경기여고 100년사(史)’집필에 참여한 경기여고 졸업생들이 재학생들에게 80년 전 조선일보 기사를 보여주면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원고 교정을 위해 모인 선배 민숙현(68), 김숙현(64), 서지문(60)씨는 마침 박물관 구경을 온 후배들을 앉혀 놓고 '경기 역사'를 들려줬다. 집필을 맡은 방송작가 출신 민숙현씨는 "경기여고생 전원이 3·1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은 이번 100년사 집필 과정에서 새로 밝혀졌다"며, "전교생의 10%가 넘는 32명이 일경(日警)에 연행됐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한 최은희(9회)씨의 회고록에서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한국 여성 공교육의 요람
편찬위원장인 김숙현 한세대 교수는 "경기여고가 단지 왕의 명령으로 하루 아침에 생긴 학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당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학교를 세워달라고 먼저 요청했다"고 말했다.
'경기여고 100년사'는 이에 대해 1898년 10월13일자 독립신문을 인용하고 있다. 북촌 양반가 부인 100여 명이 고종께 상소를 올려 "학교가 아니면 총혜한 계집 아해들을 가르칠 도리가 없다"며 학교를 지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칙령으로 현재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 한옥에서 최초의 관립여성고등교육기관 '한성고등여학교'가 탄생한다.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그러나 남녀 구별이 엄격하던 시대에 여성 교육기관이 자리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대 어윤적 교장이 고관대작 집을 일일이 돌며 학생을 보내달라고 애원해도 정원 150명을 채우지 못 했다. 그러나 2년 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김 교수는 "나라에서 세운 학교가 똑똑한 여성들을 가려 뽑아 신식 교육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배움에 목 마른 여성들이 몰려든 것"이라고 말했다. 집필위원인 고려대 서지문 교수는 "일제시대에도 경기여고 졸업생들은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공립학교 교사로 활약해 민족 교육에 앞장 섰다"고 말했다.
◆각계에 포진한 인재들
이후 최고의 명문 자리를 굳힌 경기여고는 숱한 인재들을 쏟아냈다. 현 18대 국회에서 이성남, 이영애, 조배숙 의원 등 20여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으며, 최초 여성법무장관 강금실, 최초 여성대법관 김영란을 비롯해 경기여고 출신 법조 인사가 40여명에 이른다. 박양실 전 보건사회부 장관,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황산성 전 환경처 장관 등은 정부 각료를 지냈고,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허운나 전 한국정보통신대 총장 등 대학 총장을 지낸 동문도 여럿이다. 재계에는 장영신 애경그룹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미경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 등이 있으며,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도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예술계에는 시인 강은교,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윤을 비롯,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던 디자이너 노라노, 탤런트 김혜자, 가수 양희은 등이 있다.
1911년 첫 졸업생 31명 이후 100년 동안 경기여고가 배출한 졸업생은 3만7000여명. 경기여고동문회인 경운회 문영혜 회장은 "경기여고 100년은 곧 한국 여성 공교육 100년이었다"며 "앞으로 100년은 세계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대표 여성 교육기관으로 거듭 성장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경기여고는 15일 경기여고 교정에서 개교100주년 기념식과 축제를 비롯, 100주년 기념관 착공식을 개최한다. 오는 7∼13일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는 동문초대 특별 미술전이, 15일부터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는 '여성양장 100년사' 특별전이 열린다.
경기여고 동문들
▲정계=구임회·이범준(9대), 현기순·김옥렬(10대), 이경숙·황산성(11대), 김장숙(12,13대), 장영신·허운나(16대), 김명자·김애실·이계경·이은영·이경숙·홍미영(17대), 이성남·이영애(18대), 조배숙(16,17,18대) 국회의원 등
▲법조계=강기원·강금실·황덕남·김연미·김은주 변호사, 홍선경 국제변호사, 전수안·김영란 대법관, 김선혜·김정민 판사, 김효정 검사 등
▲학계=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 김영중 서울대 약대 교수, 윤정옥 정신대대책협의회장·이화여대 명예 교수, 정진성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부의장·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
▲의료계=최초 개업의 허영숙, 최초 여성 외과의사 박귀원, 최초 여성 치의학박사 김찬숙, 한국희귀질환연맹 창립한 아주의대 김현주 교수, 서울대의대 안규리 교수 등
▲문화계=시인 강은교 동아대 교수,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최윤 서강대 교수, 연극평론가 구히서, 서양화가 홍정희, 도예가 한애규, 설치미술가 양주혜 홍익대 교수,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이신우, 탤런트 김혜자, 가수 양희은·이미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