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프랑스가 백신 못 만든 까닭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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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프랑스가 백신 못 만든 까닭입력 2021.03.12 03:00 | 수정 2021.03.12 03:00 1888년 '면역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가 설립한 파스퇴르연구소. 프랑스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이지만 코로나 예방 백신 개발에 실패했다./르파리지앵 일간 르몽드가 한탄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중 유일하게 프랑스만 백신을 만들지 못해 자존심이 뭉개졌다고 했다. ‘면역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의 나라가 왜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서구 선진국 중 프랑스는 가장 관치(官治)가 두드러진 나라다. 소수 엘리트가 정·관계 요직을 차지하고, 이들이 대기업 고위직도 넘나든다. 분야별로 대표 기업 한두 곳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회사들은 정부가 대주주인 경우가 적지 않고, 아니더라도 경영진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정부 주도 시스템이 나름 효율이 있기도 하지만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 민간의 활력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백신에 도전할 만한 곳은 파스퇴르연구소와 1위 제약사 사노피인데, 둘 다 실패의 쓴맛을 봤다. 화가 난 프랑스 언론은 관료주의 덫에 걸렸다며 연일 성토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정부에 낼 보고서를 쓰느라 연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의료·과학계가 정부 우산 아래 머무르는 탓에 고급 인력의 급여 수준이 낮다는 문제도 부각됐다. 두뇌들이 두둑한 연봉을 노려 미국·영국으로 떠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파스퇴르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를 10명 배출했다고 자랑하지만 최근 50년 사이에는 2008년 공동 수상자 둘뿐이다. 프랑스와 달리 다른 서방 선진국에서 개발에 성공한 백신에는 민간의 저력이 응축돼 있다. 특히 자본시장의 역동성이 백신 개발에 큰 역할을 해냈다. 가장 성공적인 코로나 백신을 미국 화이자와 공동 개발한 독일 신생 기업 바이오엔테크가 연구 역량을 급속도로 끌어올린 발판은 뉴욕의 나스닥에 상장해 조달한 거액의 자금이었다. 미국 모더나가 백신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떠오른 비결도 가능성을 보고 목돈을 밀어넣은 투자자들이 든든하게 받쳐준 데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처럼 민간 자본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에너지가 부족하다. 게다가 모더나가 하버드대와 제휴하고 아스트라제네카가 옥스퍼드대와 공동 개발한 것과 달리 파스퇴르연구소와 사노피는 손을 내밀 만한 대학이 없었다. 평준화된 프랑스 대학들은 경쟁을 피하고 있다. 등록금을 받지 않고 정부 재정으로만 운영하다 보니 학교 시설이 낙후됐다. 백신 전쟁에 참전할 만한 역량을 기르지 못했다. 프랑스의 실패 스토리를 보고 뜨끔해야 할 나라는 한국이다. 정치인과 관료가 앞에서 끄는 방식은 선진국을 좇아가는 수단으로는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의 힘을 키우지 못하면 가장 앞선 대열에서 달릴 수 없다. 평준화를 강조하는 교육 풍토에서는 천재가 혁신을 꽃피우기도 어렵다. 미래에 찾아올 팬데믹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민간의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