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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93회 작성일 2006-03-08 00:00
소설가 최인호씨가 만난 정진석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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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가 만난 정진석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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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오른쪽)이 4일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 집무실에서 소설가 최인호 씨에게 자신의 저서에 서명해 주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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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은 동아일보와의 특별회견에서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 생각을 반만 하고 나머지 반이라도 백성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24일 바티칸에서 열리는 신임 추기경 서임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출국하기 하루 전인 4일 한 회견에서 “지도자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엄격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백성만 생각했다”면서 “지도자는 이처럼 백성만 생각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회견은 본보를 대신해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최인호(崔仁浩) 씨가 진행했다. 다음은 최 씨가 정리한 회견의 주요 내용이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는 20세기의 성자 간디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입구에는 간디가 예언하였던 ‘일곱 가지의 사회악’이라는 문구가 마치 하느님이 돌판 위에 새겨진 십계명을 이스라엘의 민족지도자 모세에게 준 것처럼 석비 위에 새겨져 있다. 흔히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으로도 불리는 그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간디가 예언하였던 대로 일곱 가지의 사회악이 팽배하고 있는 이 세기말적 혼돈의 시대에 2006년 2월 22일 낮 12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새로 탄생하는 15명의 추기경 명단을 발표하면서 그중에 한국의 정진석 대주교를 포함시켰다.

1969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임명된 이후 37년 만에 우리는 두 명의 추기경을 보유한 세계 30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하느님에게서 오묘한 섭리를 강복 받은 신시(神市)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 추기경을 통하여 어떤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륜(轉輪)하기 위함이었을까.

정 추기경을 만나러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것은 3월 4일 오전 10시.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완연한 봄날이었고 주교관 앞뜰의 나무도 생쥐 같은 실눈을 뜨고 있었다.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나 명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이곳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아 청주교구장을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명동에 머물렀던 정 추기경은 ‘명동키드’.

그런 의미에서 명동성당은 정 추기경이 태어난 구유이자 공(公)생활하기 직전까지 아버지 일을 도와 목수 일을 하였던 예수의 나사렛 목공소일 것이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까지 흰 정진석 추기경(왼쪽)은 4일 소설가 최인호 씨와의 특별회견 내내 산타클로스처럼 인자한 풍모를 보여 주었다. 정 추기경은 성직자로서 드러내고 말하기 거북한 신앙의 위기부터 가족사와 학창시절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신원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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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사회는 더욱더 복잡해지고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맡은 역할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럴 때 저는 ‘모세’를 통해 그 본을 받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모세는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서 홍해를 건넙니다. 바다를 건너기 직전 이집트는 600대의 전차와 기병대를 총동원하여 그들의 뒤를 쫓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예근성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은 ‘이렇게 죽느니 차라리 노예로서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라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는 곧 고민에 빠져 들었습니다. 백성들을 속이고 광야로 도망칠까, 자살을 할까, 아니면 백성들을 무장시켜 이집트군과 싸울까, 아니면 항복하여 다시 노예가 될까, 고민 고민하던 모세는 마침내 ‘두려워 말고 우리를 편들고 있는 하느님의 보호를 믿으라’ 하고 신앙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팔을 뻗어 홍해의 바다를 갈랐던 것입니다. 부족한 저에게는 그 어떤 계획도 그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저는 무능하고 40년 동안 평범하게 살아온 모세와 다름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일은 모세처럼 ‘하느님을 믿으라’는 신앙의 선포를 할 따름입니다.”

정 추기경은 지난해 12월 ‘민족해방의 영도자 모세’란 책을 펴냈다.

―교황께서 추기경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추기경께서 평양대교구장을 겸임하고 계신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부친께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월북하여 북한의 공업성 부상(차관)을 지낸 정원모(鄭元謨)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추기경님의 개인 가족사는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데요,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 문제는 그 어디에도 고백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야 제 입을 통해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주장은 사실입니다. 당시 외조부는 서울 수표동에서 화장 거울, 즉 경대를 만들어 파는 재산이 넉넉한 사업가였습니다. 부친은 줄곧 처가살이를 하셨는데, 아마도 자신의 사회주의 경향이 처갓집에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친께서는 광복이 되자 자진 월북하신 것으로 느껴집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어머니(이복순·1996년 작고)의 입에서도 한번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였던 것은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호적초본을 떼어 보고 알았습니다. 그때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미리 스크랩을 해 가져간 사진(동아일보 1993년 4월 28일자 호외)을 추기경에게 내밀었다. 추기경은 자신을 낳은 육친의 사진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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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어떠십니까.

“글쎄요. 주위의 신부들이 보고 저와 판박이 같다고 말하더군요(웃음). 신문을 통해 본 아버지의 사진이 생전 처음 제가 본 얼굴입니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얼굴을 이제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제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잃어버린 유일한 민족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잃어버린 얼굴들을 만나야 하겠지요.”

―추기경께서는 평양의 교구장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북한을 방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복형제들과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추기경의 아버지는 월북하여 새살림을 차리고 생활하다 숙청당했다.

“때가 있으면 방문하여 만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북한에서 너무나 많은 요구를 해서….”

―무엇을 요구하던가요.

“물질적인 것인데 상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0년간 서울대교구는 매년 10억 원씩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였습니다만 방문을 조건으로 물질적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6·25전쟁 때 쌍방이 비인도적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남북이 화해하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해에 앞서 먼저 할 일은 서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정 추기경은 첫발을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 내에 ‘민족화해센터 및 참회와 속죄 성당’을 건립하는 계획으로 내디뎠다. 전쟁의 피해와 상처의 원인을 상대방에게만 전가하는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서로 ‘내 탓이오’라고 속죄하고 참회하는 공간을 통해 그 첫 삽을 뜨려는 것이다.

―추기경께서 신부 생활을 해 오실 때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화두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었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가 1961년 처음 사제로서 서품 받을 때 상본(像本·천주나 성인들의 화상이나 성구를 적은 카드)에 적혀 있던 문구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 구절을 좋아합니다. 언젠가는 예수의 일생을 쓰는 소설의 주제로 그 구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린 공통점이 있군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추기경께서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감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베드로의 대답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할 뿐입니다. ‘아이고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고 물질의 풍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지수는 오히려 퇴보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하느님이 주신 평화와 행복을 가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주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성소입니다. 부모의 이혼은 자녀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치명적인 살인 행위와 같습니다. 가정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영성을 일깨우십시오. 성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바람입니다.”

―성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물질로부터 해방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눈이 나쁜 사람에게는 안경이 필요하지만 시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안경이 필요 없는 것처럼 우리들은 가정에서 서로를 구속하는 갈등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인정하고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거듭날 수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원죄로부터 추방되기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을 그리워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아이고….”

정 추기경은 손사래를 쳤다.

“저도 인간인데 어찌 그리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나는 세속적인 속물답게 호기심 많은 얼굴로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였다.

“글을 쓰는 것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글을 쓰시는 것으로 극복하시다니요.

성 프란체스코(1182∼1226)는 육욕의 유혹과 싸우기 위해 장미꽃밭을 뒹굴어 가시가 자신을 찌르게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눈밭을 뒹굴어 눈사람을 만들고 나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보라, 네가 꿈꾸는 아내와 자식은 이처럼 눈으로 만든 설인(雪人)들이다. 이들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햇볕이 나면 녹아내릴 유한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작업’이 정 추기경의 장미 가시였던가.

“제가 맨 처음 출간한 책이 1953년에 펴낸 ‘성녀 마리아 꼬레띠’였습니다. 꼬레띠 성녀는 이탈리아 소작인 농부의 딸이었으며, 약간 모자란 여인이었습니다. 12세 때 오두막집 계단에서 윗옷을 꿰매고 있을 때 18세의 이웃집 청년 알렉산데르가 그녀를 강제로 침실로 끌고 가 겁탈하려 하였지요. 그러자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이것으로 인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분별력을 잃고 단도로 마구 찔러 성녀를 살해하였습니다. 1950년 그녀의 시성식에는 66세가 된 알렉산데르가 25만 명의 군중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 추기경은 자신이 펴낸 최초의 책 ‘성녀 마리아 꼬레띠’에서 수도자로서 지켜야 할 순명, 청빈, 정결의 3대 서원 중 가장 중요한 정결의 맹세를 성녀 마리아 꼬레띠를 빌려서 하느님께 서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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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께서는 지금까지 34권의 저서를 펴내셨으며, 14권이 넘는 번역서를 출판하셨습니다. 여성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강렬하셨던 것인가요.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서임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가실 텐데, 교황께 북한을 방문해 달라고 청하시겠습니까.

“침묵의 교회인 북한에는 지금 사제가 한 명도 없습니다. 교황께서 북한을 방문하시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목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선 북한에 첫 사제가 탄생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또다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간디의 말처럼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에는 온갖 독설과 비난과 싸움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에게 한마디 하여 주시지요.

“다시 유대인의 영도자였던 모세를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세에게는 자기는 없었고 오직 민족만 있었습니다. 자신을 돌보는 일도 없었고,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백성을 위한 헌신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지상의 권력자들에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웃음)”

―어떤 성가를 좋아하십니까.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때 이념 서클인 독서회에 가입했었습니다. 그때 신앙적으로 많이 힘들었지요. 유물사관으로서 ‘하느님은 없다.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학습을 받고 나니 신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나는 바로 이 명동성당에서 윤형중(尹亨重) 신부님으로부터 사순절 특강을 받고 신앙심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한 많은 슬픔에’였는데, 그 후부터 저는 그 성가를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 노래의 가사를 들려주시겠습니까.

“한 많은 슬픔에 탄식만 하오며/십자가 우러러 구슬피 우오니/인자한 우리 구세주/내 영혼 위로하소서/오 주 예수 영혼의 빛이여/불쌍한 죄인 돌보사 위안해 주소서.”

추기경의 눈가에 반짝이는 이슬이 맺혔다.

―세례명을 니콜라오라고 하신 데에는 유래가 있습니까.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제 생일이 흔히 산타클로스라 불리는 성 니콜라오의 축일(12월 6일)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추기경께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매우 모습이 비슷합니다.

내 말은 사실이었다. 흰 머리칼에 흰 눈썹, 인자로운 모습의 정 추기경은 붉은 털모자를 쓰고 흰 수염으로 얼굴을 가리면 영락없는 산타 할아버지였다. 대담을 마치고 따뜻한 추기경님의 손을 맞잡으며 나는 정 추기경님이 우리 민족의 굴뚝 속으로 해방과 평화를 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나 줄 것을 소망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가톨릭 사상 가장 유명한 성녀 중의 한사람인 대(大) 테레사(1515∼1582)는 21세 때 수녀원에 들어가 ‘맨발의 수도원’을 창설함으로써 개혁을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이 비난하자 테레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쟁터에서는 적과 싸우는 병사들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터에서는 비록 칼과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깃발을 들고 있으므로 모든 병사들에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희망과 승리를 약속하는 상징적인 기수(旗手)들도 있습니다. 이 기수들은 부상해도 쓰러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쓰러지면 깃발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수는 적(악의 세력)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적은 기수를 쓰러뜨림으로써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수를 공격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의 수도자들은 전쟁터의 기수와 같은 것입니다.”

성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깃발 없는 기수 정 추기경은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서 ‘주케토’라 불리는 붉은 모자를 받게 된다. 이 붉은 모자는 신앙과 신자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흘리는 순교자의 붉은 피를 의미한다. 붉은 핏빛의 모자가 암시하듯 가시 돋친 면류관을 쓰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맨발로 해골산을 걸어가는 또 하나의 깃발 없는 기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전능하신 하느님.

이 가엾은 정진석 추기경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맨발의 죄인 정진석 추기경에게 영혼의 빛을 비추시어 온갖 상처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주옵시고, 무엇보다 시대의 징표를 꿰뚫어볼 수 있는 하느님의 지혜와 분별력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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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소설가
 
 
 
포이동 266번지, 그 곳엔 사람과 희망이 있었다..]

서울 강남의 판자촌, 포이동 266번지 아이들은 요즘 ‘선생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 우두커니 앉아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마을회관으로 모인다. 말을 걸면 싸늘하게 고개를 돌려버리던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기도 한다. 지난 1월2일 ‘포이동 공부방’이 생기면서 아이들에게 일어난 작은 변화들이다.

-사교육 열풍? 같은 강남이지만···- 포이동 266번지는 1981년
전두환 arti_arrow.gif
정권 시절, 전쟁고아부터 넝마주이 등 도시빈민들이 강제이주를 당한 곳이다. 사람들은 ‘거지마을’이라고 불렀다. 당시 주민들은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으며 강제노역에도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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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의 주민등록에는 지도에도 없는 ‘포이동 200-1번지’가 찍혀있다. 이에 주민들은 ▲주민등록 등재 ▲토지변상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미디어칸

1989년 자활근로대는 해산됐지만, 이번엔 ‘불법점유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폐품과 재활용을 수집하며 어렵게 정착해온 주민들이 서울시 소유의 땅을 무단점유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서울시가 포이동 200-1번지를 266번지로 변경하면서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대한민국에 없는 주소’에 살면서 겪는 불이익과 ‘거지마을’이라는 차별과 냉대도 모자라 현재 수천만원대의 토지변상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간신히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얼기설기 지어놓은 판자촌.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길은 햇볕 한 줌 들지 않아 음습했다.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들. 빨래건조대부터 장롱, 냉장고까지 고만고만한 살림살이들은 골목에까지 나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아이들은 정규교육 외에 사교육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강남의 교육열을 보도하지만,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아이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기자가 공부방을 찾은 6일,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찾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끔 햄버거를 사먹느라, 친구들과 정신없이 노느라 수업에 빠지는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들이 ‘출동’한다는 것.

매주 세 번 문을 여는 포이동 공부방은 가건물로 지어진 마을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시설이라고 해봤자 머리를 맞대고 앉을 수 있는 밥상이 전부다. 교재나 물품도 그때그때 선생님들이 자급자족하는 형편이라 턱없이 부족하다. 미취학 아동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학생은 모두 14명.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겠다고 나선 자원봉사 선생님들은 무려 30여명. 포이동 공부방이 든든한 이유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모두 3명. ‘영어로 과일이름 맞추기’ 수업은 30분이 훨씬 넘어서야 시작됐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20분을 채 집중하지 못한다. 공부는 뒷전이다. 오로지 선생님에게 장난을 거느라 여념이 없다. 이웃 아주머니가 ‘먹으면서 하라’고 내놓은 개떡 덕분에 또 한참을 웃고 떠든다. 웃음소리가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내년엔 나도 ‘과외’할 거예요”-반면 중·고등 학년 수업은 국·영·수 위주의 과외 형식으로 진행된다. 수학을 담당하고 있는 신수근(대학 2학년)씨는 “기초개념부터 설명해야 하고 가끔 숙제를 안 해와 속이 상할 때가 있다”면서 “하지만 이것저것 물어보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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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공부방 선생님과 아이들이 마을주민이 간식으로 내온 ‘개떡’을 먹고 있다. ⓒ 미디어칸

초등학교 저학년을 맡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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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씨는 “부족한 게 많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선생님들을 잘 따른다”며 “교과목 위주의 수업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들자는 게 공부방의 기본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공부방에서 만난
진호 arti_arrow.gif
(가명·13)는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업이 시작하려면 두어 시간이나 남았지만 진호는 저학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눈치였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좋으냐”고 말을 걸었다. 진호는 기자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요. 공부방 없으면 방구석에 쳐 박혀서 뒹굴뒹굴했을 텐데요.”말문이 트인 진호는 선생님들이 재치(?)가 많다는 둥, 아이들이 선생님들한테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졸라 문제라는 둥, 선생님들이 담배를 조금 줄였으면 좋겠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대뜸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면 ‘과외’할 거예요. 멋진 과외선생님 만나면 열심히 공부해야죠”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여느 아이들이라면 학원이나 과외 이야기만 나와도 질색하겠지만 진호는 대단한 자랑거리처럼 말했다.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학원에 다니는 바람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많다”는 한 선생님의 귀띔을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 학교수업에서 뒤쳐지고 친구 한명 사귀기도 어려운 현실, 포이동 아이들의 이야기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요? 그거 옛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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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266번지에서 조금만 고개를 틀어보면 ‘부의 상징’이라는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 미디어칸

“밥은 못 먹을지언정 아이들은 가르쳐야지 하지만, 그게 쉬운가요. 잘 사는 집 애들이야 학원이다, 과외다 하루 종일 선생님들이 쫓아다니는데 그걸 무슨 수로 당해내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그거 다 옛말이에요.”‘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 위원회’ 조철순 위원장은 한숨부터 쉬었다. 자신도 제대로 된 자식교육을 시키지 못했지만 “교육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진다”며 혀를 내둘렀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가르쳤지만 요즘은 ‘점검’ 수준이라는 것. 또 포이동 아이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선생님들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며 “그러니 ‘없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 리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포이동 아이들은 대부분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취업한다. 몇몇 아이들이 ‘하늘의 별따기’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경우는 전무하다.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이’ 가난은 대물림된다.

그나마 공부방이 생기면서 조금의 걱정을 덜었다. 조 위원장은 “밖으로만 돌던 사춘기 아이들이 공부방 선생님들과 친해지면서 마음을 잡는 것 같다”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거지마을’에 산다고 놀림 받았는데 공부방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때문에 포이동 주민들이 모두 행복해한다”고 말했다.


선생님들이나 주민들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은 하나다. 참된 인간이 되라는 것.

“남이 울 때 함께 울고, 누군가 쓰러져 있을 때 일으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못 배웠다고, 없이 산다고 무시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 줄 아는 사람이요. 우리 주민들도 그렇게 살았고요.”수업이 끝나고 공부방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뒤로 높이 솟아오른 타워팰리스는 유난히 거대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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