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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신년초 개각에서 “金日成은 민족의 영웅”이라 극찬한 이종석 NSC사무차장의 통일부장관 기용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활빈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했던 이장관이 만든「內在的 批判的(내재적 비판적) 접근방식」 이론에다 「북한에 대한 反共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이해한 뒤 비판하자」는 주장을 통렬히 비난하며 즉각 장관기용을 중단하라고 노무현대통령에게 강도높게 요구했다.
한편 활빈단은 「金日成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부인하고 「북한지도집단의 抗日무장 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석사논문에서는 金日成을 가리켜 『군사지도자로서의 탁월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며, 金日成의 「조국광복회」,「보천보전투」활동에 대해 각각 『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反日민족통일전선체였다』고 극찬 평가한 이종석이야말로 김정일추종 친북반미좌경세력의 핵심으로 대남고첩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출처:시민단체 활빈단 www.hwalbindan.co.kr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기 남양주(47) ▲중앙중▲용산고교▲성균관대 행정학과, 정치학박사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 연구위원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수행팀 참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특사로 북한 방문▲대통령직 인수위 외교통일안보분과 인수위원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차장
(참고자료)
-이종석의 박사논문중
『주체사상의 현실적 실패가 지적될 뿐 인권탄압 등 북한정권에 대한 본질적 비판은찾기 어렵다』고 평가
-1995년 「현대북한의 이해 사상·체제·지도자」(역사비평사刊)저서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부분을 인용 내용
<이 思想은 명백히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한 金日成 지도부의 노력과 자력갱생적 삶의 추구,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주체사상의 기치를 내걸면서 金日成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주 시대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자신들에게 자주적 삶을 안겨 준 은인으로 각인되었다>
『어버이 수령은 北 논리로 자연스런 호칭』
-2000년 발간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중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이 좌절됐다』면서 『북한의 통일방안은 (연방제가 아닌) 국가연합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주장. <바로 이러한 수령은 북한에서 어버이 수령으로도 호칭된다. 부모 이외에 어버이가 있을 수 없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호칭이지만 북한의 논리에서는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관찰자들이 전하는 천부적인 사교력과 판단력은 金日成이 상당한 수준의 외교가였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국가에서 수령과 인민대중이 하나가 되는 일심단결이 강조되고, 최고의 윤리로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효성이 강조된다... 수령이 대중으로부터 충성과 효성을 맹세받는 대신에 以民爲天(이민위천)의 정신으로 인민을 대하고 「인민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치」, 즉 仁德(인덕)정치를 공언한다. 이 인덕정치야말로 현대와 봉건의 착종으로 특징 지어지는 金日成 카리스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석사논문중
<金日成의 명망성이야말로 당시 북한 전역에서 자율적으로 분출하고 있던 지방 인민정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 의 지도자로 金日成을 선택하게 하는 제일의 요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金日成은 일반 민중에게 「공산당의 영웅」이 아니라 「민족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요컨대 조국 광복회에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실천적 경험자였던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抗日무장투쟁의 聲價(성가)로 담보된 정통성을 기반으로 해방 후 혼란했던 북한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1988년 9월 「역사비평」에 기고한 「북한사회주의 정권의 성립과정」에서 金日成이 소련의 지원과 조종을 받아 집권했다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반박.
<소련이 左派의 다른 政派들을 제치고 계획적으로 金日成을 지원하고 조종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방 직후 북한의 각 지역에서 분출한 인민권력(인민위원회)도 소련의 조종에 의해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분출된 인민의 힘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金日成은 抗日무장투쟁에서 얻은 그의 정통성을 기반 으로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서 통일전선의 모색과 군중노선의 추구, 그리고 현지지도 등을 실천하였다>
-「친소파·남로계·연안파 『숙청』에 대한 最初의 연구」라는 副題(부제)가 붙어 있는 「金日成의 『反宗派 투쟁』과 북한권력구조의 형성」(1989년 8월 「역사비평」)이라는 논문중
「金日成은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남한과 미국의 많은 학자들이 金日成 지도집단 형성과정을 단순한 파벌싸움이나 피의 숙청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金日成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도집단의 형성과정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을 소련의 조정에 의해서 움직인 꼭두각시로 파악하며 그들의 성공과정을 정치적 사리사욕에 눈 먼 일개 파벌의 피의 숙청을 통한 독재권력장악으로 이해하려는 그릇된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굴절의 한국 현대사가 낳은 원한과 증오의 체현자들이 우리의 북한 연구를 독점해옴으로써 더욱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비과학적이고 이데올로기 지향적인 「꼭두 각시-파벌투쟁론」은 불식되어야 한다>
이어 『소련의 규정력 속에서도 자율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이 결국은 규정력의 극복으로 이어졌다면 「꼭두각시론」은 마땅히 폐기돼야 할 것』이라며 『우리가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金日成과 그의 동료들이 소련의 조종을 받은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은 명확히 드러난다』고 주장.
過去와 現在 북한지도집단의 성격에 대해 각각 『북한지도집단 성원들의 면면을 세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지도성원들의 대부분이 이른바 「抗日혁명전통」의 직·간접적 관련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경대학원 출신을 중심으로 抗日 유격대 관련자의 후예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북한지도집단의 人的충원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고 주장.
-金日成·金正日 父子세습 체제에 대해
<필자의 분석이 옳다면 오늘날 북한의 후계자가 공식화되어 있는 金正日이 권력을 승계할 때 북한 지도집단의 내부동요는 미미할 것이다. 그것은 金正日과 북한 지도집단內 핵심성원들 간의 공감대는 물리적 공포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抗日 혁명전통」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사상적·인간적 결속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종석 사무차장의 각종 저술 중 인용
▲“김정일이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권력핵심부 내에서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는 인사정책을 써왔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안정성은 그의 조직관리능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폭정치는 인민을 위한 정치는 그릇이 커야 하며 그릇이 크지 못하면 대중을 다 담아내지 못하며 대중이 정치를 외면 하게 된다거나 로동계급의 당의 정치는 전체인민을 정치의 주인으로 되게 하여야 하는 것인 만큼 어디까지나 정치의 폭이 넓어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한다. 오늘날 김정일의 광폭정치는 대내적으로 주민단결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경제위기 속에서 북한이 남한기업인들은 물론 교포실업가들과 종교인 등을 북한으로 불러들이는 논리적 발판이 되고 있다.
▲“휴전 이후 반세기 간 계속되는 긴장과 대립, 그리고 사건의 연속 속에서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한국정부나 미국이 잘해서가 아니다. 그 해답의 반은 김일성과 북한사회가 가지고 있다. 즉 그는 우리에게 무모하리만치 음모적이고 저돌적이며 강경해 보이지만 실은 전쟁을 두려워하며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분명한 것은 김일성에게는 상당한 외교적 수완과 역량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오케스트라 연주 중 특정 연주자의 반음착오까지 알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종자론이라는 영화예술론까지 내놓을 정도로 문예이론도 상당한 수준이다.” <94년 7월12일자 한겨레신문. 이 부분은 이후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등에서 다시 반복된다.>
▲“문민정부는 반공반북에 의존했던 수구냉전세력과 결별해야 하며 정권안보수단으로 이용돼 온 국가보안법등 구시대적 반공반북관계법안은 폐기돼야 한다”<94년 실천문학 봄호>
▲“통일의 제1요건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자주성확립과 평등의 존중이다”<90년 3월 성균관대 학보>
▲“북침인가 남침인가의 문제는 한국전쟁을 살펴보는 데 무의하다고 할 수 있다” <90년 3월5일 한국정치연구회가 펴낸 북한정치론에서 이종석씨가 집필한 부분>
▲“북한의 거주이전*여행자유제한은 사회주의 특성과 남북군사 대치 하에서 택한 방어적 조치이다” <90년 2월 사상문화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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