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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잣대로 나뉜 20세기형 학제 구분 틀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예술의 사고방식에 두루 능한 21세기형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서울대뿐 아니라 많은 대학이 이처럼 학제간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참에 우리는 문과와 이과를 구분해 교육하고 이것을 대학 진학에 배타적으로 연계하는 대한민국 고교교육시스템의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고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2003년 8월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된 후 문과·이과 구분은 관념적으로는 사라졌다. 하지만 고교 현장에서는 입시지도의 편의와 선택과목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인문·사회계열과 자연계열로 나누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과·이과 구분의 오랜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가장 유연한 사고를 해야 할 청소년들이 ‘수학을 잘하면 이과, 언어능력이 뛰어나면 문과’라는 낡은 도식에 사로잡혀, 모든 학문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해 바라보는 인식을 내면화하고,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며,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
학문간 융합으로 창조적 리더를
대한민국의 젊은이에게 융합학문을 가르칠 때 가장 힘든 대목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타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심지어 적대적인 인식을 그들의 뇌에서 꺼내는 일이다. 인문사회과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기술 전공자를 키워내고, 자연과학적 사고가 가능한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를 길러낼 수 있도록 21세기 고등학교는 청소년들의 말랑말랑한 뇌에 균형 잡힌 사고를 불어넣어야 한다.
문과·이과 구분은 학문적 발전에도 큰 걸림돌이 된다. 경제학이나 철학은 수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문과생이 지원할 수 있게 돼 있어 그들에게 깊이 있는 철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자신이 문과적 성향을 가졌다고 ‘믿는’ 학생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다 보니, 자연스레 학문적 편식이 심해져 대한민국 경제학·철학의 지형도는 수학이 덜 들어간 분야로 편향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심리학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심리학자들이 인간 심리의 생물학적 토대인 뇌 연구를 위해 신경생물학적 접근과 뇌영상 실험, 컴퓨터 모델링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문과 출신 연구자들이 사회과학적 연구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문과·이과 구분은 매우 임의적이며, 학문적 정당성도 부족하며, 종합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 불합리하다.
꼭 학문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고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문과·이과 구분은 불필요하다. 고등학교 때 채워진 문과·이과 족쇄로 그들의 다양한 진로 선택을 방해해선 안 되며, 창조적인 사유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예술 등 편식 없는 교육은 훗날 그들이 경영에 인문학을 도입하고, 예술에 과학기술을 뒤섞으며, 고급스러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귀한 자산이 될 것이다. 줄기세포나 광우병 같은 과학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에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도움을 줄 것이다.
유연한 사고 막는 폐해 심각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한 설문에서 고등학생들이 문과 또는 이과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특정 과목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50%에 가까운 학생들이 적성이나 진로 때문이 아니라 수학이나 국어 같은 과목이 싫어서 문과나 이과를 선택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수학이 싫어 문과를 선택해야만 했던 학생들이 고등학교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해도 수학적 사고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하긴 매우 어렵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내려온 문과·이과 구분의 오랜 타성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 교육은 편협한 사고에 매몰된 전문기능인을 길러내는 일을 멈추고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 창조적 리더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잠재력을 가진 청소년들의 좌뇌와 우뇌, 어느 한쪽에 자물쇠를 채우는 일은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정재승 객원논설위원·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jsjeong@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