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quee><font color=blue size=3><b>독립운동가,조선 소년단 창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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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조선 소년단 창설자 조철호
( 趙喆鎬 / 1890~1941)
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중위에 임관되었다.귀국후 용산 병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독립 운동 대열에 참가하기 위하여 군사 기밀을 빼내어 14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신의주에 이르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과거 사관학교 재학 당시 일본인 교관의 도움으로 악형은 면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후에 가출옥되었다. 그 뒤 오산(五山)학교 체육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교생을 지도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일로 다시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출옥후 김성수의 주선으로 중앙고보(中央高普 현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때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청소년의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병식(兵式) 체조를 과하였으며, 1922년에는 소년독립군의 배양에 뜻을 둔 조선 소년군(朝鮮少年軍:지금의 대한소년단)을 창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보이스카우트'의 효시(嚆矢)로, 청소년들에게 독립 사상과 민족적 단결을 고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24년에는 조선 소년군과 소년 척후대가 통합되어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초대 총재, 이상재(李商在))으로 발전하자 부총무로 취임하였으며, 한편 그해 개최된 어린이날 행사에는 방정환, 이종린 등과 함께 준비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26년 6·10 만세운동 때에는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 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뒤 북간도의 동광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는데 1931년에 학교운영자금의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들어왔다가 32년 재차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때 김성수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와, 그 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소년군의 총사령으로 취임하여 본격적인 보이스카우트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지도자 강습회를 실시하였고, 1933년 기관지 [의여차(義如此)]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1937년에 일제가 조선소년군을 일본 보이스카우트에 병합시키려하자 대항하다가 결국 강제해산을 당하였으며 자신은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후 1939년 보성전문학교에 체육교수로 근무하였으나 그동안 여러차례의 옥고로 인하여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 해방의 빛을 보지 못하고 1941년에 죽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조선 소년군은 해방후 46년 3월 사단법인 대한 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하였으며. 그 후 66년 4월 한국 보이스카우트로 개칭하였다. 52년 8월 제1회 전국잼버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55년 1월 세계 보이스카우트에 가맹하였다.
1922년 10월 5일 모교 중앙중,고등학교에서 8명의 대원이 선서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 보이스카웃의 발생지가 되었습니다. |
여명의 눈동자[OST]
댓글목록
여명의 시대에 관산 조철호 선셍이 계셧다면 광명의 시대엔 그냥 김민철 선생이 있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