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에 김종인50회선배님(前청와대경제수석)의 어른이신 佳人 김병로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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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독립운동가-가인(佳人) 김병로(金炳魯) 선생
국가보훈처는 일제 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항일 법조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사진)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발표했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러·일전쟁 중 목포에 정박한 일본군함을 보고 서구문명을 수용키로 결심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갔다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수학했다.
이후 일제에 박해받는 동포를 구하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1910∼1915년 일본 니혼대학 등에서 유학했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사 시험 응시가 좌절되자 1915년 귀국,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해 김상옥의거, 6·10만세운동, 의열단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애국활동에 대한 무료 변론을 했다.
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등 교육운동과 충무공유적보존운동 등 민족의식 고취운동을 병행하다 1931년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는 등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됐다.
광복 후 건국운동에 투신해 초대 대법원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건국과 민족정기 구현을 위한 활동을 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일제 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항일 법조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사진)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발표했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러·일전쟁 중 목포에 정박한 일본군함을 보고 서구문명을 수용키로 결심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갔다가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수학했다.
이후 일제에 박해받는 동포를 구하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1910∼1915년 일본 니혼대학 등에서 유학했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호사 시험 응시가 좌절되자 1915년 귀국,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해 김상옥의거, 6·10만세운동, 의열단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애국활동에 대한 무료 변론을 했다.
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등 교육운동과 충무공유적보존운동 등 민족의식 고취운동을 병행하다 1931년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는 등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됐다.
광복 후 건국운동에 투신해 초대 대법원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건국과 민족정기 구현을 위한 활동을 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