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동국제강, <font color=blue>장세주</font>(63회)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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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은 가족 함께 부대껴라"
공장신축 땐 현장 상주… 기술자이름 줄줄이 꾀
"다툼없이 얻는다" 9년째 교섭없이 賃協 마무리
동국제강은 올 1월부터 이달 14일까지 누적 매출액이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했다. 사상 최대치였던 작년 실적(1조9500억원)을 이미 능가했다. 매출 2조원 돌파는 포스코와 INI스틸에 이어 세 번째다. 최근엔 AK캐피탈이 보유하던 연합철강 지분도 완전 인수, 숙원이던 연합철강의 증자(增資)도 하게 됐다. 장세주 회장은 ‘재벌 3세’ 중에선 가장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경영자란 평을 듣고 있다.
◆3대에 걸친 철강경영
동국제강은 재계 서열 26위로, 다른 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끈끈한 가족경영 풍토가 특색이다. 오너 3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체 직원 중 15%인 200여명이 형제·자매·부자 등 가족 사원이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기존 직원들의 추천을 중시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가 나중에 그 회사에 입사하면 설렁설렁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장세주(張世宙·1953~) 현 회장은 장상태(張相泰·1927~2000)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창업주인 장경호(張敬浩·1899~1975) 회장의 손자다.
창업자 장경호 회장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20세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착실히 자본을 모은 그는 1954년7월 서울 영등포에 있던 한국특수제강을 인수, 동국제강을 창업했다.
◆소금벌을 메워 최신식 공장으로
장경호 회장은 1956년 당시 29세였던 3남 장상태씨를 동국제강 전무로 입사시켜 공동 경영에 나섰다. 서울농대와 미국 미시간주립대(경제학석사)를 나온 장상태 회장의 경영참여로 동국제강은 본격적인 경영 현대화를 이뤘다.
장경호 회장은 1963년 부산 용호동의 개펄 21만평을 매립, 대규모 철강공장 건설에 나섰다. “철강산업은 민간기업이 하기 힘들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동국제강은 개펄 매립과 공장건설, 그리고 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결국 소금벌을 옥토로 바꿔놓았다.
전체 경영을 맡아오던 큰형 장상준씨가 지난 1978년 작고하자 장상태 회장이 부친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경영일선에 나섰다. 80년대부터 동국제강은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상태 회장은 “회사가 잘 될 때 내부의 불합리를 고쳐야 한다”면서 원재료 조달과 영업부문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또 내부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일본지사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국제 철강업계 동향을 주의깊게 관찰해 경영에 접목시켰다.
◆부친에게 받은 23년간의 경영수업
장상태 회장의 맏아들인 장세주 현 회장은 연세대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78년 동국제강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오너의 직계가족이라고 봐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상태 회장은 “내 아들이라고 해서 절대 특별대우를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장세주 회장은 회계·기획·영업·인천제강소 등 여러 현업부서를 거치면서 대리·과장·차장 등 모든 직급을 차례로 밟았다. 그는 공장 대리시절에 원재료인 고철(古鐵)을 다루면서 철강제조의 메커니즘과 경쟁력에 눈을 떴다. 이후 부친의 경영을 지켜보며 기획단계에서부터 공장신축, 공장운영, 기술 도입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배워 나갔다.
1996년 부자(父子)는 그룹의 진로변경을 앞두고 머리를 맞댔다. 주력공장이던 부산제강소를 폐쇄하고 포항지역에 신규 생산기지를 건설하기로 방침을 정한 때였다. 하지만 무엇을 생산할지가 문제였다.
장세주 회장은 부친에게 선박제조용으로 쓰이는 후판(厚板)공장을 짓자고 건의했다. 국내 조선산업이 성장할 것을 내다본 판단이었다. 장상태 회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포항공장은 사세를 키우는 데 결정적 힘을 실어준 공장이 됐다. 동국제강은 현재 세계 3위의 후판메이커로 우뚝 섰다.
◆직원을 내 가족처럼
장상태 회장은 “농민의 발걸음은 논밭의 가장 좋은 비료”라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철강공장을 새로 건설할 때는 매일같이 현장에 주재했다. 건설인부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공사에 만전을 기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곧잘 술자리에서 20년 전 회사에 근무했던 전기기술자·제강전문가의 이름을 외우면서 그들의 업적과 기술력, 집념 등을 얘기하기를 즐겼다.
직원들 사이에 편이 갈리지 않게 파벌형성을 절대 금한 것도 유명하다. 그는 “모든 직원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는 문구를 경영어록에 담아놓았다. 싸우지 말고 얻는 것이 제일이라는 노자(老子)의 ‘부쟁(不爭)의 논리’도 강조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싸움으로 해결하지 않고 대화와 화합으로 일을 결정하던 태도를 경영에도 그대로 접목시킨 것이다.
장세주 회장도 직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는 “대리 시절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족구를 하거나 퇴근 후 소주잔을 기울이던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회상한다. 지금도 사원들의 경조사는 꼭 챙긴다.
이런 노사화합의 전통이 이어져 동국제강은 지난 95년부터 9년 연속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해오고 있다.
◆내 아들보다 회사가 중요
장상태 회장은 작고하기 직전인 2000년3월 포항제철 출신의 김종진(金鍾振) 회장을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했다. 아들의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장세주 회장도 부친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 2000년 장상태 회장이 작고하고, 2001년 김종진 회장마저 불의의 헬기 추락사고로 숨지자 사내 경영권이 흔들렸다. 장세주 회장(당시 사장)은 친척, 사내외 인사들을 두루 만나 오너인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하는 것이 과연 좋을지 폭넓게 의견을 수렴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최종 수락의사를 밝혔다. 동국제강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23년 만의 일이었다.
◆재산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장상태 회장은 1996년 100억원을 출연, 대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사업과 불우이웃을 돕도록 했다. 평생 부동산에 눈을 돌리지 않은 장상태 회장이 작고하면서 아들들에게 남겨준 것은 회사 주식뿐이었다. 편법으로 세금을 줄여보려 하지 않아, 상속세가 엄청나게 나와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장경호 창업자도 평생 모은 개인재산 35억원을 사회에 되돌려주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2000여억원에 달한다.
장세주 회장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얻은 이익은 다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조부와 선친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섭기자 fireman@chosun.com )
공장신축 땐 현장 상주… 기술자이름 줄줄이 꾀
"다툼없이 얻는다" 9년째 교섭없이 賃協 마무리
▲ 장세주 회장(맨오른쪽)이 임원들과 사무실을 들여보고 있다. 왼쪽 사진은 고 장상태 명예회장. | |
◆3대에 걸친 철강경영
동국제강은 재계 서열 26위로, 다른 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끈끈한 가족경영 풍토가 특색이다. 오너 3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전체 직원 중 15%인 200여명이 형제·자매·부자 등 가족 사원이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기존 직원들의 추천을 중시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가 나중에 그 회사에 입사하면 설렁설렁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장세주(張世宙·1953~) 현 회장은 장상태(張相泰·1927~2000)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창업주인 장경호(張敬浩·1899~1975) 회장의 손자다.
창업자 장경호 회장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20세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착실히 자본을 모은 그는 1954년7월 서울 영등포에 있던 한국특수제강을 인수, 동국제강을 창업했다.
◆소금벌을 메워 최신식 공장으로
장경호 회장은 1956년 당시 29세였던 3남 장상태씨를 동국제강 전무로 입사시켜 공동 경영에 나섰다. 서울농대와 미국 미시간주립대(경제학석사)를 나온 장상태 회장의 경영참여로 동국제강은 본격적인 경영 현대화를 이뤘다.
장경호 회장은 1963년 부산 용호동의 개펄 21만평을 매립, 대규모 철강공장 건설에 나섰다. “철강산업은 민간기업이 하기 힘들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동국제강은 개펄 매립과 공장건설, 그리고 생산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결국 소금벌을 옥토로 바꿔놓았다.
전체 경영을 맡아오던 큰형 장상준씨가 지난 1978년 작고하자 장상태 회장이 부친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경영일선에 나섰다. 80년대부터 동국제강은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상태 회장은 “회사가 잘 될 때 내부의 불합리를 고쳐야 한다”면서 원재료 조달과 영업부문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또 내부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일본지사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국제 철강업계 동향을 주의깊게 관찰해 경영에 접목시켰다.
◆부친에게 받은 23년간의 경영수업
장상태 회장의 맏아들인 장세주 현 회장은 연세대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78년 동국제강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오너의 직계가족이라고 봐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상태 회장은 “내 아들이라고 해서 절대 특별대우를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장세주 회장은 회계·기획·영업·인천제강소 등 여러 현업부서를 거치면서 대리·과장·차장 등 모든 직급을 차례로 밟았다. 그는 공장 대리시절에 원재료인 고철(古鐵)을 다루면서 철강제조의 메커니즘과 경쟁력에 눈을 떴다. 이후 부친의 경영을 지켜보며 기획단계에서부터 공장신축, 공장운영, 기술 도입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배워 나갔다.
1996년 부자(父子)는 그룹의 진로변경을 앞두고 머리를 맞댔다. 주력공장이던 부산제강소를 폐쇄하고 포항지역에 신규 생산기지를 건설하기로 방침을 정한 때였다. 하지만 무엇을 생산할지가 문제였다.
장세주 회장은 부친에게 선박제조용으로 쓰이는 후판(厚板)공장을 짓자고 건의했다. 국내 조선산업이 성장할 것을 내다본 판단이었다. 장상태 회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포항공장은 사세를 키우는 데 결정적 힘을 실어준 공장이 됐다. 동국제강은 현재 세계 3위의 후판메이커로 우뚝 섰다.
◆직원을 내 가족처럼
장상태 회장은 “농민의 발걸음은 논밭의 가장 좋은 비료”라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철강공장을 새로 건설할 때는 매일같이 현장에 주재했다. 건설인부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공사에 만전을 기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곧잘 술자리에서 20년 전 회사에 근무했던 전기기술자·제강전문가의 이름을 외우면서 그들의 업적과 기술력, 집념 등을 얘기하기를 즐겼다.
직원들 사이에 편이 갈리지 않게 파벌형성을 절대 금한 것도 유명하다. 그는 “모든 직원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는 문구를 경영어록에 담아놓았다. 싸우지 말고 얻는 것이 제일이라는 노자(老子)의 ‘부쟁(不爭)의 논리’도 강조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싸움으로 해결하지 않고 대화와 화합으로 일을 결정하던 태도를 경영에도 그대로 접목시킨 것이다.
장세주 회장도 직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는 “대리 시절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족구를 하거나 퇴근 후 소주잔을 기울이던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회상한다. 지금도 사원들의 경조사는 꼭 챙긴다.
이런 노사화합의 전통이 이어져 동국제강은 지난 95년부터 9년 연속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타결해오고 있다.
◆내 아들보다 회사가 중요
장상태 회장은 작고하기 직전인 2000년3월 포항제철 출신의 김종진(金鍾振) 회장을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했다. 아들의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장세주 회장도 부친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 2000년 장상태 회장이 작고하고, 2001년 김종진 회장마저 불의의 헬기 추락사고로 숨지자 사내 경영권이 흔들렸다. 장세주 회장(당시 사장)은 친척, 사내외 인사들을 두루 만나 오너인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하는 것이 과연 좋을지 폭넓게 의견을 수렴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최종 수락의사를 밝혔다. 동국제강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지 23년 만의 일이었다.
◆재산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장상태 회장은 1996년 100억원을 출연, 대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사업과 불우이웃을 돕도록 했다. 평생 부동산에 눈을 돌리지 않은 장상태 회장이 작고하면서 아들들에게 남겨준 것은 회사 주식뿐이었다. 편법으로 세금을 줄여보려 하지 않아, 상속세가 엄청나게 나와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장경호 창업자도 평생 모은 개인재산 35억원을 사회에 되돌려주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2000여억원에 달한다.
장세주 회장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얻은 이익은 다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조부와 선친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섭기자 fireman@chosun.com )
댓글목록
63회 동기생 장세주교우의 자랑스런 기사를 읽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더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도~~~ 자랑~~~
장세주교우 홧팅!!!!
장세주 선배님 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