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 골목을 오르내리며. . .
본문
계동 골목을 그래도 조금은 자주 오르내리는 편입니다.
2주일에 한번은 그 동네에서 모임이 있고,
1년에 두어번은 식구들과 삼청동을 혹은 계동골목을 오르내립니다.
큰 딸은 본관을 보면, 이제 '아빠네 학교'라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참,
한 때 꿈은 내가 나온 중앙고교 1년생으로 만드는 것이었었는데. . .
자주 그곳을 오르내리면서,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처음 계동에 발을 디딘 것은 1979년이었습니다.
휘문고등학교를 현대에서 사서, 참 공사를 열심히 하던 그 때였습니다.
승리체육사에서는 학생 버스표와 아이스크림을 바꾸어 먹던 물물 교환 경제의 시절.
대동상고 앞 떡뽁이 집에서 여름이면 100원짜리 팥빙수를 먹던 시절.
보충수업이 없던 그 학교 그 골목에서는 여름이면
푸른 제복 빵떡 모자를 쓰던 물결들이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물결치던 그 날들이었습니다.
중학교 73회, 고등학교 76회.
그 때 우연히 56회 선배들을 만나면 참 높이 보였고, 존경스러웠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62회 졸업생 모임에 참석해서 보았던 선배들은 참 존경스러웠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재학생들이 당시의 내 나이이던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후배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학교 선배님이자 선생님이시던 정대성 수학 선생님께서는 참 존경스러웠었는데,
지금 나는 그 때의 내 모습에서 어떻게 비추어질까.
나는 자랑스러운 선배일 수 있을까.
그 후배들의 모습에 나는 계동 골목을 떳떳하게 오르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자주 계동골목을 오르내리면서 자주 내 청춘들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어느덧 나이 먹어버린 이 청춘을 돌아보면서,
나의 꿈을 이루어준 그 계동골목에서 가끔,
나의 모습을 보고는 합니다.
그 때 선배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 주었었는데,
지금 나는. . . .
2주일에 한번은 그 동네에서 모임이 있고,
1년에 두어번은 식구들과 삼청동을 혹은 계동골목을 오르내립니다.
큰 딸은 본관을 보면, 이제 '아빠네 학교'라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참,
한 때 꿈은 내가 나온 중앙고교 1년생으로 만드는 것이었었는데. . .
자주 그곳을 오르내리면서,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처음 계동에 발을 디딘 것은 1979년이었습니다.
휘문고등학교를 현대에서 사서, 참 공사를 열심히 하던 그 때였습니다.
승리체육사에서는 학생 버스표와 아이스크림을 바꾸어 먹던 물물 교환 경제의 시절.
대동상고 앞 떡뽁이 집에서 여름이면 100원짜리 팥빙수를 먹던 시절.
보충수업이 없던 그 학교 그 골목에서는 여름이면
푸른 제복 빵떡 모자를 쓰던 물결들이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물결치던 그 날들이었습니다.
중학교 73회, 고등학교 76회.
그 때 우연히 56회 선배들을 만나면 참 높이 보였고, 존경스러웠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62회 졸업생 모임에 참석해서 보았던 선배들은 참 존경스러웠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 재학생들이 당시의 내 나이이던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후배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학교 선배님이자 선생님이시던 정대성 수학 선생님께서는 참 존경스러웠었는데,
지금 나는 그 때의 내 모습에서 어떻게 비추어질까.
나는 자랑스러운 선배일 수 있을까.
그 후배들의 모습에 나는 계동 골목을 떳떳하게 오르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자주 계동골목을 오르내리면서 자주 내 청춘들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어느덧 나이 먹어버린 이 청춘을 돌아보면서,
나의 꿈을 이루어준 그 계동골목에서 가끔,
나의 모습을 보고는 합니다.
그 때 선배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 주었었는데,
지금 나는. . . .
댓글목록
좋은 글입니다...성기형님....야구장에서 뵈었지요...재학생들한테 간다고 응언깃발 들고 가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언제나 행복하세요
큰 바위 얼굴의 글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훌륭한 선생님인 박성기후배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채근담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오지요.문장이 극치에 이르면 기이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니하며, 오직 평범할 뿐이다.박성기 선생은 틀림없이 좋은 후진을 많이 만들어 낼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