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義士) 김상옥을 아십니까 "경성 천지 뒤흔든 3시간 대격전"
| | | ▲ 일제 당국의 보도금지가 풀린 직후 김상옥 의사의 의거 관련 기사를 전 지면에 걸쳐 보도한 1923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 3면. | | |
“경성(京城) 천지(天地)를 진동하든 중대사건의 전말/ 척신(隻身) 단총(短銃)으로 다수(多數) 경관(警官)을 대적타가 기지(其志)에 경사(竟死).”
1923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 3면은 12단 전 지면을 통해 그해 초에 있었던 서울 한복판에서의 시가지 전투를 상세히 보도했다. 기사는 “신출귀몰하게 몸을 숨기다가 경관을 만나서는 용맹스럽게 최후 일각까지 교전타가 몸을 마쳐”라고 이어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사진기를 응시하는 한 젊은이의 사진을 실었다.
그의 이름은 김상옥(金相玉·1890~1923). 꼭 80년 전,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과도 같았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였던 인물이다. 사단법인 김상옥·나석주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는 23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김상옥 의사 의거의 역사적 재조명’이란 제목으로 순국선열 김상옥 의사 의거 제80주년 기념학술회의를 연다.
서울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3년 1월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1월 12일 폭탄의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 당국을 전율케 했고, 닷새 후엔 추격하는 일경을 상대로 후암동에서 총격전을 벌여 5명을 쓰러뜨렸다.
열흘 뒤인 22일, 김상옥은 효제동에서 단신으로 일경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된다. 형사대·집총대·기마경찰대·헌병대 등 4중으로 포위한 1000여명의 군경에 맞서 권총 두 자루만으로 무장한 김상옥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싸워 적 15명을 살상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으로 평가되는 이 전투 끝에 그는 마지막 총탄 한 발로 자결했다.
학술회의에서 ‘김상옥의 생애와 초기활동’을 발표하는 유준기(劉準基) 총신대 대학원장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야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했던 그의 생애는 항일독립운동의 축소판과도 같다”고 평가했다.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는 ‘1910~20년대 의열투쟁과 김상옥 의사의 1923년 서울 의거’에서 “1920년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의열단은 공화주의를 구현하려는 독립혁명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성수(朴成壽) 국제평화대 총장은 ‘김상옥 의거의 역사적 의의’에서 “김상옥 의사는 김원봉(金元鳳)의 사회주의 계열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의병정신의 계승자”라고 말했다.
김상옥 의거는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끈질긴 보도를 통해 조선 민중에게 소상히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1923년 1월 14일자 ‘종로서를 비격(飛擊)한 폭탄성(爆彈聲)’, 19일자 ‘재작(再昨) 불효(拂曉)에 총성이 굉굉(轟轟)’, 23일자 ‘순사 총살범인과 수색대가 2시간여의 대격전’을 통해 각각 종로서·후암동·효제동 의거를 대서특필했다. 3월 16일자엔 김상옥의 추도대회를 보도하며 ‘이력을 슬픈 말소리로 설명할 때에 듣는 사람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고 썼다. 박성수 총장은 “당시 일제 감시하에서의 위험을 무릅쓴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상세히 알리면서 애국심을 고취한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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