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옷 입고 촌 일 할 수 있간디…”
‘몸뻬’를 말한다
담양군 창평면 농로에서 만난, 논둑의 잡초를 뽑고 있던 50대 아주머니가 입은 옷은 ‘몸뻬와 비옷’으로 이루어진 ‘투피스’였다. 가는 곳마다 몸뻬와 비옷이다. 장마철이라서 비옷을 입었겠지만 몸뻬는 철이 따로 없다. “여름에는 얇디 얇은 놈 입고, 시한(겨울)에는 솜이 있는 것도 입고, 이녁이 입고자픈 대로 입제….” 창평 아주머니 말이다. 그 중 몸뻬가 최대로 소용되는 시기는 여름. 농사철인 데다 비를 비롯한 물에 가장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일 많이 할 때는 하루에 세 번도 갈아입는다”고 말한다. 허리와 발목을 조이고 다른 부분은 풍성하게 하여 활동성을 높인 작업복. 몸뻬에 대한 통상적인 규정이다. 몸뻬의 전래에 대해서는, 1940년대에 제2차세계대전이 격렬해지면서 여학생과 아녀자들의 방공복, 노력동원을 위한 작업복의 용도로 일제가 강제보급하면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몸뻬에 대한 순화어가 ‘왜바지’ ‘일바지’ ‘허드렛바지’인 점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과 60∼70년대 새마을운동이 맞물리면서 ‘강제’는 없었지만 여성노동력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어 몸뻬는 확고하게 ‘작업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오믄 비옷입고, 농약할 때는 방수복 입고, 쟁기질 할 때는 고무 장화를 신어.” 화순군 동복면에서 만난 윤공석(70)할아버지 패션은 비옷 상의에 허리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방수복은 비옷과 다르다. 햇볕 짱짱한 날 농약을 하기 때문에 방수복은 비옷보다 얇고 가볍다. 과연 방수복이나 비옷을 ‘옷’이라고 할 수 있을까. 농부들의 ‘와이셔츠’라는 면에서 분명히 옷이겠지만, 멋보다는 기능성이 과도하게 강조된 탓에 농사도구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분명한 것은 몸뻬든 비옷이든 간에 촌패션의 근간을 이루는 ‘옷’들은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쌀 필요도 없고, 멋도 그다지 소용이 안된다. 편하고 부담이 없어야 촌패션 대열에 낄 수 있다. “삼천원짜리는 밑이 미어집디다. 확실히 물짜. 오천원짜리는 깨깟하니 더 좋고, 만원짜리는 참말로 조∼읍디다.” 윤공석 할아버지 옆 논에서 일하고 있던 이순심(66) 할머니가 꿰고 있는 몸뻬의 서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천원 짜리나 오천원 짜리를 선호한단다. 꼭 돈을 아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시방은 주어(기워) 입도 안항께, 싼 놈 사서 입고 떨어지믄 땡게 분다”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이다. 비옷은 한 벌에 8000∼1만원 선. 더 얇은데도 그 기능의 중요성 때문에 방수복은 2만5000∼5만6000원 사이로 비옷보다 훨씬 비싸다. 몸뻬를 망측한 옷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서 유래되었고, 허드레옷이며, 여성들이 ‘긴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난, 억척스러움, 누추함 등 몸뻬에 스며있는 상징성 때문에 망측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기피해야 할 옷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많다. 실용성이 아니라 신분이나 부를 나타내는 사회적 기호로서 옷이 기능한 데 따른 생각들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 고급옷 로비사건이 터졌을 때 ‘활빈단’이라는 단체가 장관 부인들에게 자숙의 의미로 몸뻬를 보낸 적이 있다. 3000원짜리 몸뻬와 3000만원 밍크코트를 대비시키고, 놀고 먹지만 말고 일 좀 하라는 뜻에서 그랬다. 몸뻬말고 시골 여인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은 무엇일까. 집안 일과 바깥일을 함께 해야 하는 농촌 여성들의 고된 노동에는 몸뻬만한 동반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일하는 데 편리한 몸뻬가 천대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 하나의 중요한 시골패션은 모자다. 일반적으로 시골 남성들은 거의 모자를 사지 않는다. 행정기관, 농협, 농약사 등에서 대부분 주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쓰는 모자는 차양이 넓고 사막지대의 차도르처럼 볼과 목을 가릴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설계가 복잡해 값이 조금 나가는 탓인지 주로 농약사 증정품을 사용하거나 가끔씩 구매한다는 점에서 남성 모자와 차이가 있다.
몸뻬 비옷 방수복 모자 장화…거의 도구에 가까운 이 ‘장비’들을 굳이 ‘패션’이라 이름한 까닭은 사시사철 일이 끊이지 않는 농촌 환경에서 이 ‘장비’들은 완전히 일상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장날 입고 나가는 땡땡이 무늬 블라우스와 통치마, 그리고 결혼식 때나 입는 양복, 한복 따위의 옷들이 차라리 특별한 날에 착용하는 도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옷이 시방은 쌔부렀어. 떨어지도 안하고. 돈 많은 사람들은 존 놈 사 입고 돌아댕기데마는, 이녁들이사 그라등가 말등가 우리는 이것이 조아. 나도 자석들이 사준 옷 많애. 그란디 딴 옷 입고 어디 촌 일 할 수 있간디…” 시골 사람들에게 옷의 기준은 확실히 ‘일’이었다. 이정우 기자 arrti@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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