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가의 화두는 단연 '리처드 그라소'다.
어디를 가나 금융가 사람들은 그 를 입에 올린다.
대부분 반응은 "해도 너무했다"다.
여론에 굴복하고 퇴임했지만 그의 지나친 '탐욕'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1억4000만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퇴직보수만 비난받은 것은 아니다.
한끼 점심 에 얼마를 썼다는 둥, 회사공금을 사적인 일에 유용했다는 둥, 내부에서는 조 그만 반대 목소리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둥…. 한 마디로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 는 상황이다.
아이비 리그 출신 MBA들이 수두룩한 월가에서 대학졸업장도 없는 가난한 이탈 리아 출신 이민 2세의 성공스토리는 이제 머나먼 이야기다.
9ㆍ11테러 후 1주 일도 안돼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성공리에 개장하자 언론들이 보냈던 '월가 의 영웅'이라는 찬사는 빛바랜 공치사가 돼버렸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천 민 자본가'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그라소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미국식 자본 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른바 만능으로만 여겨졌던 이사회 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사회의 주요 멤버는 굴지의 금융기관 CEO들이었다.
골드만 삭스, 메릴린치, 베어스턴스의 헤드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실 이들은 이너 서클 회원들이라고 보면 된다.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긴 하지만 크게 보면 '초록은 동색'이고 이들이 그라소의 보수 패키지안을 승인했던 주범들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언론이 문제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수익을 내는 상 장기업도 아닌 증권거래소라는 공공단체의 장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돈을 챙 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존 리드 전 시티그룹 회장이 NYSE의 임시회장으로 선임돼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 역시 이너 서클의 오랜 리더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발표된 제임스 케인 베어스턴스 회장의 보수도 일반인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자그만치 1억1700만달러다.
비록 80~90년대 현금 대신 회사의 주식을 보수로 받았던 것이 주가상승으로 대 박이 터졌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친 액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역시 그라소의 보수안을 승인한 이사회 멤버란 점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식의 서로 퍼주 기가 월가 정상들에게 일상화된 셈이다. 주목할 것은 상류층의 돈잔치에 가려진 빈곤층의 악순환이다.
최근 발표된 미 국인의 소득분포는 충격적이다.
연방통계국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층 비율은 20 00년 11.3%에서 2001년 11.7%, 그리고 지난해에는 12.1%로 계속 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미국 정부는 3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수입이 1만4000달러(1600만원 상당) 이하 면 빈곤층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를 지난해 비율에 적용하면 미국인 전체 중 3460만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NGO 발표 역시 충격적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상위 1%의 소득 이 나머지 40% 소득과 맞먹는다는 것이다.
지난 79년 상위 1%의 소득이 나머지 20%의 소득에 해당됐던 것을 감안하면 20년 사이에 소득 불평등도가 훨씬 심화 됐다.
소득 불평등에 실업난이 더해지면 상황은 간단치 않다.
현재 미국 실업률은 6% 를 넘고 있다.
부시 행정부 들어와서만 27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이유로 대규모 감원과 비용감축을 단행한 이면에는 직장에서 쫓겨 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다.
경기는 점차 회복되는 추세라지만 빈곤층을 포함한 버려진 3000만~4000만명에 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이쯤되면 세계 최고 부자나라라는 말도 머쓱해진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만은 워리드 옵티미즘( Worried Optimism)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말로 옮기면 '고민되는 낙관론'이 나 '걱정스러운 낙관론'쯤 될 것이다.
뭔가 잘 되어갈 것으로 막연히 기대는 되지만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복병이 나타나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작지 않게 우려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외로운 제국 미국의 현주소는 정치ㆍ경제적으로 워리드 옵티미즘인 것이다.
<뉴욕 = 전병준 특파원 bjjeo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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