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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건 조회 657회 작성일 2003-09-14 00:00
경민이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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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7일 우리나라에 잠시 체류후 혼자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좌석을 찾으니 롱다리들이 앉아 가기엔 제격인 비상구 옆자리였다.
안그래도 11시간 동안을 좁은 좌석에서 혼자 갈 생각을 하니 조금은 걱정이 되던 차였다.
 
한 10분을 기다리고 있자니, 내 옆자리엔 열대엿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자리를 잡았다. 어찌됐건 11시간동안 나란히 앉아 가야할 동행인 셈이다.
 
십여 분이 흘렀을 까.., 난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걸기 시작했다.
 
"혼자 서 가니? 런던엔?"
"예!"
"무슨 일로?"
"예, 전 웨일스에 있는 Secondary School에서 유학하고 있어요."
"혼자서?"
"예!"
"몇 학년이니?"
"한국으로 말하자면 고 1이요"
"얼마나 됐니? 영국에는"
"이제 1년 반됐어요"
 
고등학교 1학년생이 혼자서 유학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영국에는 주로 대학생들 이상의 유학생, 어학연수생들이나
엄마와 함께 오는 기러기가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차피 긴시간동안 동행이 된 이상, 요즘 청소년들의 생각과
혼자서 보내는 유학생활등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 볼 참이었다.
 
" 혼자서 기숙사 생활하면서 지내기가 쉽지는 않지?"
"아니요."
 
의외다. 난 당연히 힘들어요라는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엄마,아빠, 식구들은 안 보고 싶니. 그리고 음식 적응도 만만치가 않을 텐데"
"그런 건 있지만,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오히려 영국이 편해요"
 
"뭐가 그렇게 힘들디?"
"저희 집이 평촌이거든요. 그 지역이 좀 유별난 건 있지만, 거기서 있는 제 친구들
얘길 들어 보면, 보통 새벽 2시정도에 집에 들어가요. 왜냐하면 야자(야간자율학습)하고
학원 갔다 오면 대충 그 시간대 거든요. 그리고 4시간 정도 자고 학교에 가야지요."
"오마이 갓!.. 그게 정말이야. 고1인데?"
"예, 그래요. 그렇게 안하면 내신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이쯤 대화를 하고 나니,나는 대충 감이 잡혔다. 입시지옥을 피해 이른바 전인교육의 천국으로
피난유학을 온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영국학교에서 써클 활동은 어떤 걸 하니?"
"아뇨! 그런 거 하면 엄마가 난리나죠... 저희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신데..
제가 옥스브리지가는 걸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고 계세요... 이번 여름 방학동안
한국에 2달 있으면서 4과목을 집중 과외를 받았거든요..이제 돌아가면 GCSE(수능시험
의 일종)준비를 시작해야 하고요. 그럴 래면 친구들 만날 시간도 없어요."
 
또 의외였다. 나는 이 아이의 비장한 공부 목표를 들으면서 흡사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출사표를 읽는듯 했다. 이 아이의 눈 빛은 이미 입시전쟁의 전사가 되어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조금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친구도 사귀고 써클활동도 하면서 안목도 넓히고 다양한 경험도
해보는 것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또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므로
소설책이나 영화에 빠져 보는 것도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큰 자산이 될거라고..
 
고등학교 시절의 내 경험담을 담은 예의 장광설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 아이는 흥미로운 채린징을 시작한다. 내게..
 
"아저씨! 그러다가 대학도 못들어가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잖아요?"
"음.. 아니야. 그렇지 않어. 아저씨가 생각하기엔 좋은 대학과 행복과는 대개 관련이
없어.."
"무엇이 행복인데요. 아저씨."(이 아이가 쎄게 나온다``)
"행복은 주관적이야. 다만 확실한 것은 세상의 명예나 돈이 행복을 보장하거나 가져다
주지는 않는 다고 생각해. 아저씨가 생각하기엔....행복은 마음에 있어.. 그런데 그 마음
이란 것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기고 대학을 못 나왔다고 도망가고.. 그러지 않어."
 
"아저씨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이제껏 듣던 말하곤 완전히 달라요.
우리 엄마 때문인진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성공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고, 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많지요. 그런 보장하에서 행복도 추구
되는 거구요."
 
"좋은 대학을 나오면 성공할 가능성은 당연히 높을 수도 있지.. 하지만 성공과 행복은 별개라는 말
이야. 너희 나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이고, 어디다 가치를 둘 것인가
를 놓고 고민하는 것도 꽤나 중요해. 그것에 따라 너희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형성되고
가치관이 형성되는 거야.  좋은 대학은 여러가지 가치척도 중에 그저 하나일 뿐이야."
 
나는 다시 설교아닌 설교를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대학 나와야 사회에 기여한다고? 그것도 반드시 그렇지 않아.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만큼, 우리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에 관련된 사람들도 꽤나 많지..
정치판도 그중 하나고, 법조,언론집단을 봐도 그렇고, 재벌기업의 많은 브레인들을 봐도 그렇고 말야. 
못 배운 사람들은 그 주변에만 피해를 끼치지만 소위 지배계층이 되면
사회에 해악이 되고 나라 전체에 부담을 주게 되지. 아저씨가 생각하는 좋은 지식이란 올바른
마음위에 쌓여 질때 사회에 기여가 되고 공헌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너희 나이에 이런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공부문제와 밸런스를 취해 볼 필요도 있다는 말이야"
 
말이 길어 졌다. 그리고 나서도 우리는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흡사 바둑의 패싸움처럼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이 아이의 이름은 김경민,
나는 경민이의 이메일 주소를 받고 계속 연락할 것을 약속한 채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경민이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두어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속엔 
궁금증만 커지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아이들을 획일적 입시교육의 전장으로만 내몰고 있는가?"
 
런던에서 류영재(70)올림

댓글목록

(中)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국체류중에 해준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내가 근 보름간의 배낭여행직후라 경황이 없었어서, 즉시 만나자는 제안을 못했었습니다. 한 번 우리 사무실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셨구려~! 가족들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 영국기러기?일텐데 그곳에서도 건강히 지내시길...
(中) 작성일
선배님! 예 전 "역기러기아빠"지요. 아빠가 공부하러 외국에 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 갔습니다. 지난 번엔 저도 선배님을 꼭 좀 찾아가 만나 뵙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여의치가 못했습니다.이곳에서나마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께서도 모쪼록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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