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女응원단에 마취된 사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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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美女응원단에 마취된 사회 |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북한 응원단이 대거 참석했다. 미녀 대학생 3백명으로 구성된 이번 응원단은 취주악단까지 동반했다. 이들이 경기장에서 관중 세몰이에 큰 역할을 한다. . 북한 응원단이 출현하는 경기장은 모두 표가 매진되지만 이들이 빠진 경기는 썰렁할 뿐이다. 관중은 막상 경기보다는 북한 응원단이 펼치는 다채로운 카드 섹션과 현란한 춤사위에 넋을 잃고 있다. . 고혹적인 자태에 매료된 관중이 이들에게 다가가 "이름이 뭐냐"며 환영이 지나쳐 추파를 던진다. 미녀 응원단의 조직적인 응원과 넋을 잃은 관중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착잡하고 무겁기만 하다. . 미녀 응원단의 화사한 자태 위에 앙상히 뼈만 남은 굶주린 북한 동포의 얼굴이 무수히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응원단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카드섹션, 그들의 춤사위에 섬뜩한 한기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 내가 왜 이렇게 방정맞고 우울한 상상을 하는가? 김정일이 줄곧 예술을 정치적 선전도구로 악용해 왔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그랬듯이 김일성과 김정일은 예술과 음악을 국민의 사기를 돋우는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했다. . 그래서 북한 음악에는 슬픔과 고통이 없다. 이것은 국민의 선동과 사기진작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을 노래해야 한다. . 이번 응원단을 미모의 여대생을 주축으로 결성한 배경에는 북한의 정치.심리적 고려가 짙게 깔려있다. 한마디로 한국 총각의 혼을 송두리째 빼놓자는 것이다. .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미녀 대학생만을 추리되 짙은 화장은 피해 청순하게 꾸몄다. 남쪽의 가공적 자본주의 미와 극적으로 대비시켜보자는 의도다. 순수한 한국적인 미를 남쪽 총각에게 깊이 각인시키자는 '심뽀'다.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헤일로 효과(후광 효과)를 가져온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의 나라도, 그녀의 국민도 아름답고 청순하게만 느껴진다. . 북한의 굶주림, 가공할 원자탄을 미녀의 고혹적인 자태로 감싸자는 수법이다. 철없는 관중이 미녀응원단을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린다. 이 광경을 보고 지금 북한 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 내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이유는 북한 응원단이 내뱉는 섬뜩한 구호,"사상.투지.속도"를 눈여겨보는 관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용기를 내라. 우리는 믿는다"라는 저들의 구호가 실상은 북한 선수를 격려하기보다 한총련 학생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너무 피해망상적일까. . 북한 응원단은 한국의 붉은 악마처럼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이었어야 했다. 그런 응원단을 남쪽에 파견했어야만 했다. 북한 정치.경제 사정상 그렇게 못 한다면 최소한 각계 각층의 시민과 남녀노소로 응원단을 구성했어야 한다. . 그것이 올바른 응원이고 진정한 응원단이다. 일부 특수층, 그리고 빼어난 용모로 구성된 미녀응원단은 더 이상 응원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선전과 선동을 위한 정치적 꼭두각시일 뿐이다. . 그러나 북한 선수단에게는 아련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기아선상을 해매는 동포를 뒷전으로 하고 화려한 복장에 억지 웃음을 지어야만 하는 그녀들. 마음에도 없는 정치 구호를 목청껏 소리쳐야만 하는 애련한 그들의 자태에서 나는 이유 없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 와락 한국 동포를 껴안고 배고프고 춥고 고된 삶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그들의 벙어리 냉가슴에 내 가슴마저 무너져 내린다. 북한 응원단이 눈으로, 피부로나마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한껏 느껴보고 정성스레 담아가길 바란다. . 짧은 한달 기간이나마 자유국가의 풋풋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가기 바란다. 한국 젊은이들이여! 그들의 한 맺힌 가슴을 보담아주는 진솔한 동포의 모습을 보여주자. 미녀에 얼빠진 주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연민의 정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자. . 이훈구 연세대 교수.심리학 . 2003.08.24 18:12 입력 / 2003.08.25 07:33 수정 2003 Joins.com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