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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야생마 ‘행정무대 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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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현장 대신 ‘행정’의 길 “85년 올림픽대표때 월드컵팀에 결승골 못잊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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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그라운드에서 혹은 코트나 매트 위에서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스포츠 스타들.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짜릿한 흥분이 느껴진다. ‘야생마’ 김주성, ‘짱구’ 장정구, ‘날으는 작은새’ 조혜정, ‘당수 1인자’ 천규덕…. 그들이 다시 보고 싶다. <한겨레>가 그들을 만나본다.
1985년 1월1일. 부산에서 86월드컵대표팀(감독 문정식)과 88올림픽대표팀(감독 박종환)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형과 아우의 격돌인 셈이었다. 월드컵대표팀에는 정용환·박경훈·허정무·박창선·변병주·최순호 등 쟁쟁한 스타들이 포진했다. 그런데 올림픽대표팀 한 공격수가 대선배들 틈에서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비며, 25~30m 짜리 왼발 중거리슛으로 결승골까지 터뜨리며 축구계를 경악시켰다. 형팀에 1-2 쓰라린 패배를 안긴 주인공은 이후 10여년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 등으로 명성을 떨치며 한국축구를 빛낸 김주성(43)이다.
“개인적으로 월드컵대표팀 꿈을 실현하는 계기가 된 골이기에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골입니다.” 1999년 프로축구 대우 로얄즈 은퇴 뒤, 2005년 10월 축구행정가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고교시절(중앙고)까지만 해도 이름없는 축구선수였다. 이른바 엘리트코스는 얼씬도 못했다. 고1 때 4강에 든 것이 최고성적이었다. 고3 때, 축구협회가 성적 못내는 학교팀 선수들을 위해 마련한 고교상비군에 선발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고교졸업 무렵, 한양대 아주대 포철 등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13명이 어렵게 팀을 꾸려나가던 중앙고 동기들을 위해 조선대를 택했다. “당시는 은사님 말씀이 법이었잖아요. 동기 3명과 함께 조선대로 갔습니다.” 대학 초년병 때도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2학년초 김삼락 감독-김기복 코치 체제의 청소년대표팀에 뽑혔고, 오근영 감독 추천으로 88올림픽대표팀의 박종환 사단에 발탁되면서 축구인생에 일대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85년 대통령배국제대회는 그가 국민들에게 화려하게 선보인 무대가 됐다.
이후 김주성은 그해 말 월드컵대표팀에 발탁돼 인도네시아와의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처음 출전했는데, 김석원 대신 후반 레프트윙으로 들어가 데뷔골을 넣으며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인도네시아 원정경기 때도 다시 골을 터뜨렸다.
프로무대서도 김주성은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대우 로얄즈에서 뛰며 89년과 91년, 97년 우승의 주역이 됐다. 99년 은퇴까지 그가 터뜨린 골은 34골. 골잡이가 아니었기에 많은 골은 넣지 못했지만, 우승의 견인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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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국내업무보다 대외활동에 주력한다. 아시아축구연맹(AFC) 경기감독관으로 활약하고 있고, 전 세계 축구협회 관계자들과 자주 만나 글로벌 네트워크도 형성하고 있다. “한국 축구도 이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걸맞게 행정도 발돋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곳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은 명쾌했다. 그는 “국제업무를 위해 어학에 능통해야 하는데 어학이라는 게 끝이 없지만 불편은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11일 오후 도쿄로 떠났다.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지난 달만해도 20일 가량 외국에서 보냈다고 한다.
김주성 프로필
△출생= 1964년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
△출신교= 속초 중앙초·서울 성수중·중앙고·조선대
△별명= 야생마·삼손
△선수시절 포지션= 레프트 윙(A매치 통산 13골, 프로통산 34골)
△프로팀= 대우 로얄즈, 독일 분데스리가 보훔
△주요경력=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선수’ 3회(1989·90·91년) 월드컵 본선 3회 연속출전(1986·90·94년) 국내프로축구 3회 우승(1989·91·97년 대우 로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