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유학생의 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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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자 그렇지 않으면 다 죽고 만다"
TV를 통해 영국인들의 토론프로그램을 지켜보는 것은 단순한 흥미이상의 관심거리를 제공한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는 토론 속에서 때론 격렬한 공방과 긴장감이 감돌지만 결코 이성을 잃고 욕설과 비방으로 치닫는 법이 없다.
내가 다니고 있는 비즈니스 스쿨의 경우도 대부분의 강의가 토론식으로 진행되지만 어떠한 토론도 일정 수위를 넘어, 갈 때까지 가는 식의 막무가내와 악다구니는 벌어지지 않는다.
엊저녁은 지도교수와 우리 반 학생 6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나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잉글리쉬(English)였고, 맥캘만(McCalman)교수는 스코티쉬(Scottish)였다. 몇 잔의 와인이 오고 간 후 화제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해묵은 지역감정의 문제로 옮아 갔다.
이야기의 소재는 과거 수 백년동안 스코티쉬들이 겪었던 사회적 차별대우와 잉글리쉬들의 지배지향적 성향, 그로 인한 스코티쉬들의 반잉글리쉬 정서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고착화에 대한 불만과 우려, 잉글리쉬들의 자기방어적 논리전개등등 이었다.
2시간 여 동안의 격론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대신에 우리나라의 호남과 영남을 대입하면 그냥 그대로 우리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만 극명하게 다른 점은 이처럼 첨예하고 예민한 사안들도 토론이라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공유해 나가는 모습이었으며, 대화의 곳곳에서는 해학과 유머 마저 넘치는 것이었다.
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 분열에 주목한다. 진보와 보수, 친미와 반미, 개혁과 수구, 유화적 대북관과 승공적 대북관, 친재벌과 반재벌, 신세대와 구세대, 급기야는 이라크 파병파와 파병 불허파로 편을 갈라 벌이는 소모적 토론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토론의 의의는 상대를 제압하는데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상대로부터 한 수 배운다는 열린 마음에 기초한다. 이러한 토론문화의 기반 위에 토론의 순기능이 보강될 때 그러한 토론이야말로 건전한 여론형성의 매개체로서 자리 매김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토론은 편을 갈라 벌이는 패싸움과 유사하다. 진보는 보수의 설 자리를 주려 하지 않는다. 보수는 진보를 위험천만한 불순분자로 까지 몰고 간다. 그 중간에서 싸움을 말리려는 중도는 기회주의적 회색분자 내지는 유약한 양시론자로 분류되고 만다. 이러할 찐대 토론을 통한 나눔의 문화가 자리잡기란 기대 난망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至難)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오늘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극단적 분열과 혼란으로 인해 우리가 치러야 했던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외세에 의한 침략과 피지배, 군부세력에 의한 압살과 독재 등은 혼란이라는 퇴비와 토양 속에서 생명력을 축적하여 우리에게 음험하게 다가오지 않았던가.
언론의 자유도, 토론의 자유도 다 좋다. 그러나 자유의 다른 이름인 절제와 책임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른바 참여정부하의 적극적인 토론도 귀중하지만, 참여의 문화란 반드시 절제와 책임 위에 기초해야 함을 이제 알아야 한다. 봇물처럼 터져 나와 제 주장만 고수하는 강퍅함으로 사회가 동강나는 것은 이제 그만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분열로 치닫는 야당을 향해 절규하듯 부르짖은 영국의 대표적 야당 지도자인 던컨 스미스(Duncun Smith)의 말이 떠오른다.
“뭉치자 그렇지 않으면 다 죽고 만다” (Unite or 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