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달중(55회·서울대 교수) 교우, 중앙일보 2003.4.9.(수)
본문
<font color=blue> [중앙 시평] 신념과잉, 신념굴절의 정치</font>
"대통령 본인이 기획·연출 자주하면 정당·국회 등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한 외국인 학자에게 밖에서 본 노무현 정권의 인상을 물어봤더니 "신념 과잉의 정권" 같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그는 정치가에게는 정치적 신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盧정권의 신념정치는 미래를 여는 "YES"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NO"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는 듯하다는 우려도 곁들여 보냈다.
그의 지적대로 노무현 정권이 신념 과잉적 성향을 띠고 출발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386세대들이 그 어느 세대보다도 그러한 성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패가망신을 시키겠다"는 식의 이른바 盧대통령의 소신 정치도 정권의 신념 과잉적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해주고 있다.
*** "노" 말해놓고 "그러나, 예스"로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신념정치는 우리 국민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국민은 그동안 신념 부재 (不在) 의 나눠 먹기식 정치에 너무나 식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신념 과잉의 정치가 아니고서는 기득 이익의 철벽을 뛰어넘는 개혁을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신념의 정치가 당면한 문제는 "YES"라고 말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이미지보다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현실 부정적 이미지가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을 보이려다 결국에는 "BUT, YES"로 돌아서 버렸는가 하면, 특검법이나 KBS노조에 대해서도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정권임을 보이려다 결국에는 "그러나, 예스"로 돌아서 버리는 우여곡절을 노정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노"에서 "그러나, 예스"로의 발빠른 이행은 매우 적절한 현실대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노"부터 말해 놓고 문제가 생기자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예스"로 돌아서는 듯한 정권의 모습은 어쩐지 신념정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신념 과잉의 정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굴러가기 쉽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정치는 성공해도 문제요, 실패해도 문제다.
일단 한번 성공하면 대통령은 본인이 기획하고 연출하는 이른바 '관객정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자신의 기획과 연출에 갈채를 보내는 국민만이 필요할 뿐 정당이나 국회 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권위주의의 망령이 나타나기 십상인 것이다. 반대로 실패하면 대통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고 혼란이 뒤따르게 된다.
이 때문에 신념정치에 의한 노무현 개혁의 시작은 곧 바로 노무현 혼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란을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낼 때까지 우리가 치러야 할 수업료 정도로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국익을 손상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전적으로 국민의 판단에 달려 있다.
*** 가해자 對 피해자式 구도 짜야
국익이 무엇인가를 토론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신념 과잉과 신념 굴절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이 '가해자', 한국이 '피해자'라든가 혹은 언론이 '가해자', 정권이 '피해자'라는 식의 발상으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격동의 국내외 정세를 헤치고 나갈 수 없다.
미국과의 마찰이 '한국의 양보'로 가닥을 잡아가고, KBS사장 임명 건 등이 '정권의 양보'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가해자 대(對) 피해자'식의 현실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당장은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념정치로 개혁을 추진할 경우 '옳고 그름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혁이 몰고올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가가 동시에 검토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NO!… BUT, YES'의 정치 패턴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2003.04.08 19:11 입력 / 2003.04.09 06: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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