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근(66회) 교우, 동아일보 2003.3.14.(금)
본문
<font color=blue><strong>투자부진, 시스템이 문제다</strong></font>
<img src="http://www.donga.com/photo/news/200303/200303130360.jpg" align=left>
투자가 얼어붙었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활발하지 못해 걱정인 정도가 아니라, 비중 면에서 훨씬 중요한 국내 기업의 실물투자가 매우 부진하다. 동료 학자나 업계에 있는 이들을 만나 물어보면 주로 환경적인 요인들을 지적한다. 초읽기에 들어간 이라크전쟁,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는 북한 핵위기, 세계증시 동반 하락에 따른 불황의 조짐, 제조업 대국으로 등장한 13억 중국의 위협, 노사관계 불안 등이 투자를 주저케 하는 원인으로 거론된다.
▼단기 업적주의가 족쇄 ▼
모두 귀담아들을 만한 지적이지만 그렇다고 환경적 요인만으로 투자가 부진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일단 시계열 지표상으로 볼 때 투자위축 현상이 빚어진 것은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의 일관된 추세다. 외환위기 전 우리 경제는 줄곧 투자가 성장을 견인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저축률이 35%에 달할 정도로 매우 높았음에도 기업들은 이것도 부족하다며 해외저축을 끌어다 왕성한 투자를 벌임으로써 총투자율을 37% 수준으로 높였다.
그러나 위기 이후 만 5년이 경과하면서 저축률과 투자율은 모두 20%대로 내려앉았다. 98년 이후 투자율부터 빠르게 추락하면서 경기가 급강하하자 당황한 DJ 정부는 국내 소비를 부추겨 경제성장을 유지하려고 했고, 그 결과 저축률도 동반 하락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우리 경제를 옥죄고 있는 투자부진 현상의 배후에는 뭔가 시스템적 요인이 개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다시 말해 과잉 중복투자의 폐해를 없애겠다고 영미형(英美型) 시스템으로 옷을 갈아입었는데, 원하던 투자 적정화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투자 말살로 이어진 것이다.
투자 분위기를 반전하려면 무엇보다 우량 기업들이 나서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들은 비교적 내부 현금흐름이 풍부함에도 여유자금을 주로 금융자산으로 운용하면서 투자를 꺼리고 있다. 자칫 중장기 투자를 시도했다가 자본시장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주가가 폭락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단기 업적주의와 상시적 주가관리 체제가 투자의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재벌그룹의 우량 계열사가 자금 여력이 부족한 타 계열사의 투자를 지원하는 상호부조 메커니즘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부채비율이 자기자본의 200%로 엄격히 제한되고 있으니 증자를 해야 투자가 가능한데, 출자총액 제한으로 인해 내부안정 지분을 확보할 수 없으니, 총수 일가는 투자를 키웠다가 자칫 지배권을 상실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편 금융시스템에도 문제가 많다. 수익성 지상주의에 매료된 은행들은 기업금융을 저버렸다. 부채비율이 100%만 넘어도 리스크 관리상 요주의 기업으로 판정하고 있을 정도다. 이로써 은행권은 자금을 운용할 데가 마땅치 않아 가계금융 폭발 사태를 조장하고 있고, 국민경제의 성장과는 무관한 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본시장이 은행의 기업금융 역할을 대체한 것도 아니다. 시장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불과 10여개 기업만을 투자 적격으로 보고 있다.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만이 투자 대상이라는 입장이니, 은행에서도 등 떠밀린 기업이 어떻게 자본시장에서 재원을 조달할 수 있겠는가.
새 정부도 투자부진 문제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감세정책이나 재정 조기집행이 거론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마도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 동북아 경제중심이나 지역 균형발전 프로젝트를 명분으로 뉴딜식 접근방법을 취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투자활성화에 정책 초점을 ▼
그러나 이런 해법에는 시스템적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어떻게 재벌그룹의 내부자본시장 메커니즘을 새로운 형태로 복원할 것인지, 어떻게 은행으로 하여금 리스크를 책임지면서도 본연의 사명인 기업금융에 주력하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경기변동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자본시장의 파행성을 교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 이제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은 각론에 머물지 말고 실물경제의 투자활성화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이찬근 인천대교수·객원논설위원ckl1022@inche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