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우리집 목욕탕 타일은 누가 붙였나? <font color=blue>김창완(62회)</font&g…
본문
|
- ▲ 김창완 가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관련돼 있을 경우, 얘기는 좀 달라진다. 예컨대 그 사람이 창문을 닦았을 때 궁금증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바쁜 사람이 왜 창문을 닦았을까? 창문을 떼서 닦았을까? 위험하게시리 그냥 매달려 닦았을까? 못 쓰는 자동차 윈도 브러시로 닦으면 좋은데 그걸 알기나 했을까? 고무장갑은 끼고 닦았나?….
무관심은 질문을 공허하게 만드는 반면 사랑은 질문조차 해답으로 만든다. 사랑은 도구다. 그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조각도가 되며 내 꿈을 매다는 풍선이 되고 사랑하는 이의 꿈 속으로 태워다 주는 배가 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를 나의 기다림으로 초대하는 초인종이 될 때도 있다. 사랑이 조각도라 하여 꼭 날카로울 필요는 없다. 또 풍선이라 하여 반드시 커다랗고 화려할 필요도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 세상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사랑이라면 소박한 만큼 더 아름답다.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보자.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분노는 자신을 할퀴고 증오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 등교하는 학생들의 재잘거림과 갓 구운 빵을 진열하는 흰 모자 쓴 빵집 아가씨의 콧노래를 감상하자. 세상에 이로운 것은 발명, 발견이라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숲을 거닐며 나무들에, 바닷가를 거닐 때 파도소리에 감사하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 상점들, 심지어 포장된 길과 가로등에 친절한 인사를 던지면 당신의 하루는 행복해진다.
대선을 앞두고 사회 전체가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는 요즘, 파당(派黨)과 지역에 따라, 또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들이 대결과 갈등의 양상을 보이며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이해와 연민으로 감싸인 방패는 내던진 지 오래다. 주장이라는 칼과 모함이라는 총만이 그들의 손에 들려 있을 뿐이다. 마음속에 사랑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창을 닫았으니, 그들이 보는 세상은 암흑과 같다. 대상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볼 수도 없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일이 곧 나를 부정하는 일이니 그들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요즘 역이나 터미널 인근 식당의 풍경. TV에서 뉴스가 나오면 사람들은 금세 두 패로 갈린다. 뉴스가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갑자기 인상을 쓰며 숟가락질을 거칠게 하는 사람들. 택시를 타도 그렇다. 예민한 사안에 대한 기사 아저씨의 질문에 대꾸를 잘 해야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저마다 자신들의 관점과 이익에 따라 목청을 돋워, 사회 전체가 낙찰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매장처럼 소란스럽다. 모든 요구와 요구들이 칼끝이 무뎌질 때까지 부딪치고 있다. 그 와중에 세상은 갈수록 힘을 잃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용광로가 있다. 갈등과 분열, 증오와 분노는 어떻게 보면 새로운 세상을 빚어내는 과정에서 존재해야 하는 필요악일지 모른다. 내가 나의 일상에 대답할 수 있고, 스스로 나의 어설픔을 껴안을 수 있으며, 결국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타인과 빚게 되는 반목과 갈등도 결국은 커다란 의미의 사랑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소소한 풍경과 장면에 대한 관심은 사회를 평화롭게 만드는 큰 사랑의 첫걸음이다. 우리 집 목욕탕에 타일을 붙인 그 사람도 분명, 어느 집의 사랑 받는 아버지일 것이며, 또 사랑 받는 아들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분명한 건, 그 사람도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