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차라리 학교를 없애? , 2003.1.25.(토)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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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24 19:07
[동아광장]김순덕/차라리 학교를 없애?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교보문고 중고생 코너에서 학생들을 붙잡고 학교가 재미있느냐고 물었다가 나는 외계인 취급을 받을 뻔했다.
“교문에서부터 두발단속 걸릴까봐 쫄면서 들어가요. 공부 못하는 애들은 조금만 길어도 선생님들이 기계로 밀어버려요. 이발사 자격증도 없으면서!”
“음악도 좋아하고 줄넘기도 좋아했거든요. 체육시험을 음악에 맞춰 줄넘기하는 걸로 보면서 둘 다 끔찍해졌어요.”
학교가 좋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만났다. “공부도 학원강사가 훨씬 잘 가르치고 이해도 잘해주는데 도대체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끝없는 ‘네 탓’의 사슬▼
과열 입시풍토가 우리 아이들의 인권을 해치고 있다는 유엔 평가가 보도됐다. ‘재수는 고4’처럼 돼버렸고 중고생 절반 이상이 ‘학원 중독’에 걸렸다는 조사도 나왔다. 모두가 대학은 가야겠는데 학교가 이 열망을 풀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의견은 공교육 탓으로 모아진다. 너무나 경쟁력이 떨어져 사교육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물론 학교가 진학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공부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면서 학교 다니는 기간을 즐거운 삶으로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공부 잘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은 잘못해도 쉽게 넘어가는 걸 보고, 장학사 온다고 실제 배운 교과목과 학급일지를 다르게 쓰라는 명령을 들으면서 아이들은 ‘세상은 그런 것’임을 배운다. 학교가 반전인(反全人)교육을 하는 형국이다.
교사들 얘기는 또 다르다. 그들은 수업 중 자는 걸 깨웠다고 짜증내는 학생들과 선생을 우습게 아는 학부모에 상처받고, 오만가지 불합리한 잡무를 내려보내는 교육관청에 분노하며, 교권을 흔드는 사회에 절망하고 있다.
교육소비자들이 ‘네 탓’이라고 비난하는 교육부조차 우는 소리는 마찬가지다. 교육정책에 혼선을 일으켜왔다고 반성문까지 내놓은 것은 가상하되, 그 원인 분석이 수상하다. 그동안의 실정이 교육부 장관의 잦은 교체 탓이라는 거다. 결국 장관을 자주 갈아치운 청와대에 최종책임이 돌아가는 셈이다.
유엔이 걱정할 만큼 우리 아이들이 고생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학벌 위주의 사회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5년 전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이해찬 장관의 말은 모두가 믿었지만 학벌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공약은 아무도 안 믿는다. 그 말만 믿고 공부 안 하고 안 시켰다가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학벌차별이 없어진대도 과열 입시가 사라질 성싶지 않다. 학벌이 직업과 수입 계층을 좌우하는 ‘법칙’이 변할 리 없거니와 아무리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나는, 적어도 내 자식은 좋은 대학을 나와야 살기 편하다고 믿는 분위기다.
평등세상이 오면야 좋지만, 남이 나보다 잘난 건 못 참으면서 나는 남보다 잘나야 한다고 여기는 이중성이 우리에겐 있다. 그래서 과외금지 시절에도 몰래 과외받는 사람이 있었고 나만의 특혜를 위해 뇌물을 주고받는다. 소수의 엘리트를 인정하고 대다수는 일찌감치 진로를 정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미국이나 유럽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너도나도 핵심인재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소크라테스의 후예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철학이지만 우리에게 “분수를 알라”고 하면 욕이 된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이 나라에 너무 익숙한 까닭이다.
▼학벌철폐보다 중요한 것▼
‘모두가 평등’의식과 ‘나는 선민(選民)’의식의 묘한 공존은 우리사회 게임의 룰이 공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줄을 잘 타서 출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통령후보 부인 시절 “친인척 단속을 철저히 하겠다”던 권양숙 여사도 막상 당선자 부인이 되자 조카딸을 비서로 앉히는 판이다. 혈연 지연은 내 맘대로 안 되지만 학연은 나와 부모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대학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공정한 룰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곳은 결국 윗물이다. 학교를 없앨 수도 없고 당장 학벌차별을 뿌리뽑는 것도 쉽지 않다. 대통령부터 공정성을 훼손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자세로 국정개혁에 임한다면 공교육도 변화함은 물론 우리 아이들도 훨씬 행복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