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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을 보면서 왜 이인제가 생각날까?
이현수 기자 lhs3971@hanmail.net
지루하게까지 느껴졌던 새천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간의 후보 단일화가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한국정치사상 초대형 대선이벤트를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25일을 15분여 넘긴 시각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단일후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노무현 후보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사실 이보다 더 의미 있었던 것은 노 후보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연 정몽준 후보의 말이었다.
그는 패배의 충격이 있어 그런지 비교적 짧은 회견에서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 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말을 남긴 채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26일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다시 만났다. 단일화 이후 양 당의 선거공조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라지만 만남 자체가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복을 우려했던 노정 단일화 시도는 과정은 다소 난항을 겪었다지만 현재의 결과까지는 괜찮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대결에서 괜찮은 승부로 마감을 하려면 승자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승복은 절대적 필요조건이 아닐 수 없다.
정몽준 후보는 승리자에 대한 축하 인사와 함께 깨끗하게 승복했다.
여기서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을 상기시켜 본다. 기억의 주인공은 현재 민주당에서 중진으로 불리는 이인제 국회의원이다. 이인제 의원은 97년 당시 경기도지사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이회창 후보에게 석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 의원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두 아들의 병역문제라는 검증에 걸려,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0%대까지 급락하면서 당내 일각에서는 '후보교체론'이 터져나와 이회창 후보를 흔들었다.
급기야 이인제 당시 경기지사는 11월 5일 국민신당이라는 대선용 급조정당을 창당하여 경선불복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출마했다. 결과적으로 490만여표를 득표하며 향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인제 의원 자신에게는 정치적 입지의 강화와 몸값 상승이라는 거사를 이루어냈지만 한국정치사에 불복이라는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기고 말았다.
그 후 5년간 차기 대통령 후보는 이회창 대 이인제 대결구도였다. 이러던 것이 사상 최초로 실시된 민주당의 국민경선을 통해 이인제 의원은 대통령 후보의 꿈을 접고 만다. 그러나 문제는 결과에 승복하며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피상적인 모양새는 그랬을는지 몰라도 그 후 행보는 그렇지 못했다.
이인제 의원은 국민경선에서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새천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는다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만 한 채 패배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사실상 두번째 불복인 것이다. 패배자는 깨끗히 인정하고 물러나야 승부 이면의 또 다른 승리자가 될 수 있지 물러날 때까지 여러 이유를 운운하며 승부에 먹칠을 해서는 그야말로 진짜 패배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인제 의원은 경선패배 그 후로도 이른바 '반노무현'의 중진으로 JP와의 연대 등을 모색하며 정치적 진로를 찾는 데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왜 결과에 깨끗히 승복하지 못하는가?
대통령 후보는 누구나 되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자리는 단 하나뿐이다. 누군가는 패배해야 하고 또 그는 결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인제 의원은 이 같은 진리를 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는 통째로 뒤집었고,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는 결과를 회피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정몽준과 이인제의 극명한 차이이다.
권력다툼에 있어 승복은 더욱 더 철저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길을 찾고 있을 이인제 의원은 정몽준 후보에게서 승복에 대한 깊은 학습을 받아야 할 것 같다.
2002/11/25 오후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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