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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28회 작성일 2002-10-12 00:00
사랑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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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ed src="http://stream.bugsmusic.co.kr/20020420128betatest/kor/05/kor0513347.asf"><p> <img src="http://www.4rest-home.org/photos/60.JPG"><p> <pre> <font color="778899" size=2> <b>사랑 일기 하 덕규</b>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개죽지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위에 바람속을 달려 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지친 어깨위에 시장 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위에 아무도 없는 땅을 홀로 일구는 친구의 굳센 미소위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사랑해요' 라고 쓴다 </font> </pre> <img src="http://www.4rest-home.org/photos/01.JPG"> <p> <pre> <font color="gray" size=2> <b>가난과 좌절로 얼룩진 젊은날의 초상</b>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 늘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정직하려 노력하는 사람. 어린 시절의 정겹던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가슴 한켠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하덕규는 한 사람의 음악인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시인이며, 한 사람의 신앙인이다. 그의 음악은 사랑의 울림이 되어 듣는 이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고, 그의 시는 순수함의 빛깔로 다가와 병들고 오염된 세계에 쉼을 전하고 있다. 1958년 7월21일생. 강원도 홍천생, 3남6녀의 대가족 집안에서 자랐다. 속초 천진초등학교를 다니다가 9세가 되면서 서울 숭의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93년 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부친은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이다. 6.25와 함께 강원도 홍천 땅에 내려오게 되었고 속초에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 하덕규의 모친과는 재혼이었다. 하덕규는 어린 시절을 꿈처럼 보냈다. 동네 앞에는 푸른 동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설악산 자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경치좋은 곳에서 자라났다. 스스로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천국과 같은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 그가 접하면서 자란 동해 바다와 설악산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정서를 키워가는 데에 결정적은 바탕이 되었다. 칡을 캐먹고, 새잡이, 고기잡이, 벌거벗고 뛰놀던 소꼽 친구들... 어린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은 늘 그리움으로 그의 노래에서 베어난다. 꿈만 같던 시골 생활은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산산이 깨졌다. 상경한지 1년 정도는 별다른 생각없이 자랐다. 함께 다니던 서울 아이들이 시골내기라고 놀리는 일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서울의 화려함은 시골내기 어린 아이의 눈엔 충분한 호기심과 가슴 설렘을 느끼게 했다. 서울에 올라론지 1년 후, 그러니까 하덕규가 숭의 국교 4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훗날 다시 정상적인 가정으로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 일은 오랫동안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연이어서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때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가난 속에서 성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가난의 생활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서울생활에 적응을 못하게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이 너무나 그리웠고 절실했다. 한영중학교와 한영고를 졸업했다. 어느새 그는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되어 버렸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의 서울은 정붙일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고교시절 비번한 가출을 했다. 고향이 그리워 설악산 어귀에 올라가 텐트를 치고 며칠간 생활하다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가 본 곳이라곤 고향쪽 밖에 없다. 옛 생각에 못이겨 고향에 가보면 그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너무나 많이 변해 있다. 마을도, 사람도, 인정도... 어느새 이 시골 어귀까지도 물질문명의 손길이 닿아 악취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설레는 마음을 안고 다시 찾아 가곤 한다. 돌아올 땐 그 기대만큼이나 큰 허전함만을 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지만. 환경에서 비롯된 그의 방황은 27세를 맞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24세때 쯤인가, 신앙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추스리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그의 가슴은 쉽게 아물 수 없을 만큼의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최종학력은 추계예대 회화과를 1학년 중퇴한 것이 전부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주 어려서부터 상당한 소질을 보였다. 선천적인 것에다 시골 생활에서 비롯된 자연의 정서가 합쳐지면서 더욱 더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교시절엔 각종 미술대회에서 여러차례 최고상을 휩쓸었다. 필기시험과 상관없이 대학에 특기생으로 진학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올렸다. 주변에서는 모두들 유명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고 하덕규 자신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학교생활도, 도시생활도, 공부에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에게 그림은 자신의 전부였다. 막상 추계예대에 진학을 했으나 갈등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자신은 원래 중앙대나 홍익대를 지원하려 했었다. 그러나 워낙 공부를 안했던 터라 너무 필기 성적이 엉망이 되어 그 꿈은 좌절됐다. 첫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의 대학생활이란 그 만큼 흥미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학교를 다니기 싫었고, 다닐 필요성 또한 느끼질 못했다. 결국 스스로 학교를 그만 두었다. 1~2년가량 화실을 경영하며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틈틈이 작곡도 했다. 미술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유학을 준비했으나 그마저 좌절됐다. 돈 때문이었다. 당시에 그는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계속된 좌절을 맛보며 오기가 생겼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젊은날들을 보상받고 싶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명예를 얻고 싶었고, 출세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미술이란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 오랜 시간과 많은 고생을 감수 해야만 했다.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쉽게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음악이 더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아티스트로서의 삶은 포기하기로 했다. 하덕규가 음악과의 끈을 맺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입학과 때를 같이 했다. 기타를 무척 갖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에게 처한 현실은 그러한 꿈이 하나의 사치로 생각될 수밖에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를 몇해가 지나고 중3이 되었을 때 펩시콜라 뚜껑에 있던 상품권을 응모해 당첨되는 행운을 얻어 비로소 기타 한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연주실력에 흥미를 느끼면서 차츰 음악에 매료되었다. '트윈 폴리오','어니언스'등은 당시의 하덕규에게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난생 처음으로 3인조 밴드를 결성해 베이시스트와 보컬을 맡았다. 물론 실력은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도였다. 이 그룹은 당연히 오래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해체를 맞았다. 결국 좌절의 연속으로 깊은 상처만을 안고 살아가던 하덕규는 돈과 명예와 출세를 얻기 위해 음악을 택했고, 그 꿈은 81년에 이르러 현실화 되었다. <b>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발돋움</b> 81년 하덕규는 음악동료 오종수를 만나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으로 듀엣을 결성하고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은 '짝사랑'과 '님타령'. 그러나 타이틀 곡 보다는 오히려 '꽃을 주고간 사랑'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건전가요를 제외하고 11곡이 수록되었는데,'남 몰래 흘리는 눈물'만이 오종수 작사,작곡이고 나머지 10곡은 모두 하덕규 자작곡으로 구성되었다. 하덕규는 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되었던 것처럼 이 앨범에서는 다분히 히트를 목적으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진솔한 자신의 삶이 전혀 담기지 않은 노래들이라고. 그러나 이런 자신의 불만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획기적인 사운드를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과적으로 너무 지나치게 앞서가는 음악 스타일을 담아낸 것이 히트에는 역효과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다할 반응을 얻지 못하자 하덕규 스스로 깨달은 점이 많았다. 어쩌면 너무 자신을 속이면서 무책임하게 음악을 대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도 있었을 법하다. 아무튼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하덕규는 신앙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조동진, 김민기, 전인권, 김창완 등과의 교류를 갖게 되면서 삶에 대한 가치관과 음악에 대한 관점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으로 몇해를 보냈고 음악세계의 변화도 꾀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자신의 음악에 대한 주제들도 바뀌어졌다. 음악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한 순간의 사고에 대해 많이 부끄러워하며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지기도 했다. 앨범 발표후 몇차례 방송에 출연한 적도 있었으나 제작진들의 오만한 태도와 상대적으로 그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용납할 수 없어서 어느 순간부터 방송출연을 절제하게 되었다. 가요계의 속성과 방송관계자 들의 태도가 우선은 못마땅했고, 가수를 프로그램의 소도구쯤으로 여기는 듯한 태도들에 더 이상 비굴해지기 싫어서였다. 거기에서 적잖은 환멸을 느꼈고, 가요계의 병폐적 속성에 영합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하덕규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분류되곤 했으며 어울리는 뮤지션들 또한 하나 같이 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83년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을 사용치 않고 자신의 본명으로 한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데뷔앨범에서 함께 했던 오종수는 음반을 발표한 이후 곧바로 길을 달리했고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혼자서 발표한 두번째 앨범에는 '꽃을 주고간 사랑','진달래','슬픈 재회'등 총12곡이 수록되었는데, 하덕규 자신은 이 앨범에 대해 '대단한 실패작'이라고 자평한다. 이 앨범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기획,제작자의 입장만이 거의 일방적으로 반영된 작품이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사장되다시피 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발매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 하덕규의 앨범이 상당한 판매량을 보이며 널리 불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제작회사에서 상업성을 노린 행위라는 견해도 적잖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서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다. 하덕규 자신은 지금에 와서 이 앨범을 들으면 너무 창피할 정도로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 음악이라는 생각이다.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이앨범에 수록되었던 '슬픈 재회'가 몇해 전 남궁옥분에 의해 리바이벌 되어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86년, 기타리스트 함춘호씨를 만서 다시'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으로 세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특히 '사랑일기'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기도. 하덕규 자신도 이 앨범에 대해서 스스로가 가장 정직하게 부른 노래들이었고 지금 와서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이 앨범의 히트가 기폭제가 되어 이후 하덕규는 언더그라운드계에서 확고한 자기세계를 구축했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도 자신의 확고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87년 4월에 있었던 꿈나무 소극장 개관기념 콘서트도 성황을 이우어 당시 하덕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 콘서트가 하덕규로서는 최초의 콘서트 경험. 또한 이 시기부터 신앙생활도 한층 깊이있고 절실하게 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실한 신앙생활은 그동안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이중구조를 극복할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고 그 깨달음에서 '가시나무'가 만들어지게 된 것. 88년에 발표한 '숲'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가시나무'는 자신의 고백을 노래로 만든 것으로 이 앨범 역시 지금까지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노래이다. '숲'앨범부터 본격적인 솔로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시인과 촌장' 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왔고 90년 가을에 '쉼'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하덕규'라는 본명을 사용했다. '숲'을 발표할 당시엔 음악인에만 그치지 않고 종교인으로서의 신념도 못지 않게 강해졌다. 음악을 통해 참된 얻음을 전하고자 노력했고 자연히 기독교적 사상이 노래에서 배어나왔다. 그리고 '쉼'을 통해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해졌다. 이 음반의 경우 대중가요라는 측면보다는 가요의 형식을 빌린 가스펠송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듯. 이러한 음악을 컨템포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고 일컫는다. 이 음악스타일은 교회 속에서의 가스펠이 아니라 대중화된 가스펠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앞으로 하덕규의 음악이 가져가게 될 방향이라는 점에서도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91년 11월에는 '시인과 촌장' 베스트 앨범이 출반되기도. 돈을 벌고 출세를 위해 선택되어진 하덕규의 음악. 흔해빠진(?) 사랑이나 이별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던 초기의 음악 스타일에서 완전히 탈피, 이제는 사회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존재근원에 대해 전하려 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신저. 노래를 통한 그의 메시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대중들의 곁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b>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시</b> 그의 시집은 89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책을 내기 이전부터 하덕규는 마치 시와 같은 아름다운 가사를 통해 문학적인 측면에서 자주 비교대상에 오르곤 했었다. 어렸을 때의 감정과 정서가 아무래도 예술분야에 깊은 영향을 마치며 하덕규 삶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듯 싶다. 그는 이 시집의 자서에서 '한때 시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비평가의 해설 속에서의 시인의 모습은 정말이지 근사해 보였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 노래의 가사가 시 같다는 소릴 자주 들어왔지만 소리가 배제된 상태의 활자로서만 노래가 보여진다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밝히며, '정말로 정직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도 말한다. 이 책은 가수 하덕규에게는 여러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시인 하재봉은 해설에서 하덕규의 시를 '가시나무에 찢긴 순결한 영혼의 노래'라고 표현하며, 그의 시는 또한 '젖어 있다'고 평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약 5만부가량 판매된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다. 지금도 찾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단다. 그는 음악이 그렇듯 그의 시도 꾸준히 팔려 나가는 스타일인가 보다. 지금도 다른 책을 출간하자는 제의가 자주 있지만 아직은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고, 우선 노래에 더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겨를도 생기지 않는단다. 새 날이 올거야 나의 영혼이 저 싱그러운 들판에 사슴처럼 뛰놀 티 없는 내 마음 저 푸르른 강을 건너 영원한 평화로움에 잠길 새 날 새 날이 올거야 나의 눈물이 그치고 슬픈 우리 별에도 종소리 들려 어렵던 지난 날 눈물로 뿌리던 그 아름다운 열매들이 그대 뜰에 익을 때 새 날 새 날이 올거야 떠나간 새가 저 햇살 넘치는 언덕으로 돌아올 어여쁜 날개짓 그 푸른 잎사귀를 물고 나의 가난한 마음에 날아와 안길 새 날 -하덕규시집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중에서 </font> </pre> 이상 "하덕규의 집"(http://www.4rest-home.org/)에서 발췌...<p> <a href="http://stream.bugsmusic.co.kr/20020420128betatest/kor/13/kor1350627.asf" target=_blank><b>"가시나무" 듣기(Click!)</b></a><p> <a href="http://stream.bugsmusic.co.kr/20020420128betatest/kor/13/kor1350623.asf" target=_blank><b>"한계령" 듣기(Click!)</b></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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