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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 대한 끈끈한 애정은 서먹한 세대 차이를 금세 녹여 버렸다. 지난 1일 인천 중구 전동 제물포고등학교(교장 박종조)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신사들과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10대 소년들이 선·후배가 되어 만났다. 조선일보 ‘스쿨 업그레이드, 학교를 풍요롭게’ 캠페인에 참여한 제물포고 21회 동기회(회장 박찬호) 선배들이 1억원이란 거액을 모교발전기금으로 모아 전달하는 날이었다.
“이 학생 머리 빡빡 깎은 거 보니 옛날 생각난다. 그땐 머리카락이 조금만 자라도 불호령이 떨어졌잖아.” 새파랗게 깎은 후배의 뒤통수를 쓸어보던 선배가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학생은 질문을 받자마자 “환경 공무원이 돼 환경 오염 개선에 힘쓰고 싶다”고 답했다. 선배들은 “장하다! 과연 ‘제고’ 학생답다”며 흐뭇해 했다.
‘제고’라는 약칭으로 잘 알려진 제물포고는 졸업 20주년과 30주년 기념 행사를 여는 전통이 있다. 1977년 졸업한 21회 동문 350여명은 지난달 13일 3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에서 모교발전기금 1억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날 전달식을 가졌다. 학교는 이 돈으로 낡은 건물을 손보고 교육 기자재를 마련키로 했다. 야구·농구부 학생들도 선배들의 후원금 혜택을 보게 된다. 한 졸업기수에서 1억원이나 모금하기 위해 21회 졸업생 대다수가 각자 30만원 가량을 내놓았다. 동기회 박찬호 회장(DHL액셀서플라이 체인코리아 이사)은 “우리가 사회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전부 학교 덕분이라는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비평준화시대 명문고로 이름났던 추억담으로 흘러가자 동기들은 앞다투어 이야기를 꺼냈다. “‘졸업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새벽에 도서관 전깃불을 제일 먼저 켜봐야 한다’고들 했습니다. 그러려면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30분에 등교해야 했어요. 교문이 닫혀 있어 담을 넘어서 도서관 불을 켜면 어머니가 나중에 도시락을 배달해 주셨죠.”(류명하 아트앤디자인 발행인) “문구점에서 외상으로 학용품을 사도 제고 교복만 입으면 오케이였어요. 깡패도 제고 학생들 돈은 안 뺏는다는 우스개도 있었지요.”(최병일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책임연구원) 동창생들은 이어 교내 음악감상실에서 LP레코드로 팝송을 듣던 일,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를 몰래 봤던 일, 학교 도서관을 지을 때 벽돌 날랐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맞아, 맞아” 하며 웃음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30년 선배를 만난 2학년 김범중군은 “제고는 1956년부터 전국 최초로 무감독 시험을 치른 전통을 지금껏 지키는 학교”라며 “‘정직’을 중요시하는 우리 학교와 선배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제물포고 10회 졸업생이기도 한 박종조(59) 교장은 “기부금이 학교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우리 학교 학생들이 사회에서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발전기금 전달식을 마친 졸업생들이 운동장으로 나왔다. 이들이 30여년 전 생물시간에 심었다는 묘목들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 교정 곳곳에 서 있었다.
(인천=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