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준(70회) 교우, 매경 '데스크 진단'
본문
매일경제 2002.6.26.(수) 데스크 진단
-----------------------------------------------------------
[데스크진단] 아이크와 히딩크
1944년 6월 6일 연합군에 의해 감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무모한 시도였다. 독일군은 이미 연합군의 상륙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대규모 화력을 해안에 집결시켜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연합군으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승리를 상징하는 특단의 전과가 필요했다.
또 소련군의 서진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유럽대륙에 하루라도 빨리 발을 들여 놓아야 했다.
아무튼 상륙작전은 감행됐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맞은 1994년 서방 언론들은 연초부터 대대적으로 이 작전의 성공을 재평가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초점은 작전 성공의 비결이었다.
수많은 기자가 동원돼 당시 생존자 들에 대한 취재가 이루어졌다.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타임은 50주년 특집호에서 '상륙작전의 성공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하고 성공 요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장군에서 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점과 상륙작 전을 총지휘했던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일명 아이크)에 대한 병사들의 존경심이 그것이었다.
상륙이 감행되는 순간 먼저 해안에 오를 경우 총알받이가 된다는 사실을 병사들 스스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앞을 다투어 상륙을 감행했다.
누가 진격을 명령하지도 않았다. 수많은 병사가 쓰러졌고 그 위를 또 다른 병사들이 밟고 지나가는 참상이 밤새 되풀이됐다. 교두보는 조금씩 확보됐고 독일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동이 터올 무렵 전황은 연합군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D데이가 다가오자 아이크의 고민은 커져만 갔다.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병사의 죽음이 명약관화(明若觀火)했기 때문이었다.
상륙작전 전날 아이크는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이번 작전의 중요성을 설득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병사들은 "사령관님, 저희들 걱정은 마세요. 사령관님처럼 훌륭한 군인의 부하로 죽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부디 우리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시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세요"라며 오히려 아이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타임은 이를 '신비로운 아이크의 리더십'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축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려 하고 있다. 아니 이미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룬 점을 감안하면 작전은 100%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준우승이니 우승이니 하는 것은 오히려 덤이다.
세계 축구전문가들은 벌써부터 한국 축구의 성공비결에 대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 전국민의 열렬한 응원, 의표를 찌른 작전 등이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 축구의 기적과 58년 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첫째, 이번 월드컵에 참여하고 있는 태극전사 23명의 투혼이 매우 자발적이라는 데 필자는 주목한다. 물론 과거에도 투지는 한국 축구의 전매특허였고 국민들의 성원도 높았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만에 유럽을 능가하는 체력을 기르고 연장전을 거듭하는 혈투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은 그들의 투혼이 타율이 아닌 자율 속에서 싹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승리에 대한 뚜렷한 목표의식이 그 배경이 됐음은 물론이다. 벤치워머들의 진심어린 성원과 환호 역시 23명이 한마음 한가족처럼 단합돼 있다는 증거다.
둘째, 히딩크와 선수들간의 관계다.
타임이 '미스터리'라고 지적했듯 이 병사들의 아이크에 대한 애정은 서양문화 속에서는 쉽게 인식하기 힘든 대목이다. 감독과 선수들이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서구에서는 절대적인 애정과 존경이라는 문화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딩크는 동양인, 아니 한국인의 성품 속에 사제(師弟)라는 관계가 있음을 간파했고 위엄을 갖추면서도 진심어린 애정으로 선수 들을 지도한 것이다. 선수들 역시 히딩크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를 이방인 감독이 아닌 존경하는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달려가는 선수들의 눈빛과 제스처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히딩크를 사랑하는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지 않은가.
아이크와 히딩크. 58년의 시차를 두고 세계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가고 있는 이들 두사람에게서 동양적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했다면 억지일까.
<전병준 월드컵팀장 bjjeon@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