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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정치인들 뒤에는 언제나 ‘이번엔 누가 대운이다’라는 점괘와 소문이 무성하다. 여론조사 등을 통한 과학적 예측 방법이 발달해도 여전히 역술인들의 대선 판도 점괘는 주목을 받는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나서 역술인들을 ‘입소문 마케팅’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서울 강북구 미아동 일대에 늘어선 점집들. 청와대 전경. 2002년 대선 당시 한 후보의 연설회에 모인 청중. 동아일보 자료 사진 |
3월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직후에도 이 측근은 “이명박 후보의 운은 8월 말로 끝난다. 그 다음은 우리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8월 말이 지나도 꺾이지 않았고, 손 전 지사에게 대선의 ‘운’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비단 손 전 지사뿐이 아니다. 대선에 뛰어든 정치인 뒤에는 ‘누구에게 대운(大運)이 왔다’는 점괘가 따라다녔다. 그런 정치인 중 상당수는 이미 대권 가도에서 멀어졌다. 1997, 2002년 대선 때도 점괘가 제대로 맞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 캠프 주변을 떠도는 예언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이 후보도 자신에 대해 좋게 얘기하는 역술가의 점괘는 오래 기억하고 있다. 이 후보는 사석에서 “서울시장 시절 어떤 점쟁이가 내게 와서는 ‘운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바꿔 가는 것도 있다. 시장님은 얼굴상보다 마음상이 좋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말하곤 한다.
이 후보 측은 대선 후보가 된 직후 경호 문제로 현 서울 종로구 가회동 집을 옮기려고 성북구 성북동 한 주택을 점찍었지만 없던 일로 했다. ‘이사할 집을 찾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 하지만 “일부 측근이 ‘풍수지리를 아는 많은 사람이 지금의 한옥집이 터가 좋다’며 움직이지 말 것을 권유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이 본격화한 9월 초 정동영 후보 측에서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2004년 초 4월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정 후보가 ‘노인 폄훼 발언’으로 곤욕을 치를 때 나타나 앞으로 차지할 의석수까지 맞히고, 고건 전 국무총리의 낙마와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을 내다봤다는 50대 남성 역술가가 정 후보의 경선 승리를 예언했다는 것. 정 후보 측에서는 아직도 이 역술가의 예언을 말하는 측근들이 있다.
그러나 올해 초 각종 언론에서 역술인이 본 대선 주자의 운세를 소개할 때 손 전 지사를 대통령으로 꼽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97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을 예언해 유명해진 한 여성 무속인은 “이번 대선의 최후 승리자는 손학규”라고까지 밝히기도 했다.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 결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한 인사도 점괘를 활용해 손 전 지사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인사는 프랑스 역술가가 점친 손 전 지사의 올해 운세를 전하며 당을 뛰쳐나올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6월이면 대운이 펼쳐진다는 것이 그 점괘의 골자였다는 것.
○ 시류를 따르는 점괘
이명박 후보 캠프에선 이 후보와 무관하게 점을 보러 다니는 측근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 따르면 이 후보의 점괘가 여론 지지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한 측근은 “지난해 8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잘나가던 시기에 점쟁이 10명 가운데 이 후보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2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올해 경선 막판에는 그 10명 가운데 8명이 이긴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한 측근은 “요즘 점을 보면 이 후보가 12월 대운을 타고 집권에 성공한다는 점괘가 대부분”이라며 “정말 용한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점쟁이가 시류를 따라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역술은 시류를 따르기도 하지만 시류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 측은 ‘정주영=정도령’이라는 입소문을 내기 위해 역술인들을 대상으로 상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측도 ‘전두환=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역술인들을 찾았다.
그러나 상당수 역술인이 전 사령관의 사진을 보고 ‘임금상이 아니다’고 했다는 것. 그러자 보안사에서 역술인들을 ‘특별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점괘는 ‘입소문 마케팅’의 주요한 수단도 되기 때문에 각 대선 캠프는 ‘관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유비통신’으로 음해성 얘기들을 쉽게 퍼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대위 직능조직 가운데 이들을 담당하는 팀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빗나간 과거 사례
과거 대선 때도 정치권 안팎에서 대선 주자들의 운세 얘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대선 결과와 일치하는 점괘는 그리 많지 않았다.
2002년 대선을 3개월 앞둔 9월 하순 한 잡지는 역술인 및 무속인 5명의 예언을 실었다.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당 내분 등으로 지지율이 추락해 수개월째 곤경에 처해 있던 때였다. 이 5명 중 어느 누구도 노 후보의 당선을 자신한 사람은 없었다.
1997년은 역술인들이 큰 낭패를 본 해로 기억된다.
유명 역술인 및 무속인 상당수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승리를 자신했다. 당시에는 “나무 목(木) 자 성을 가진 후보가 유력하다”, “야권 통합은 어렵고 여권이 승리한다”는 빗나간 전망으로 가득했다. 아주 일부만 “기성세대의 마지막 인물이 당선된다”며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을 뿐이다.
정치권에서 대선은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 게임으로 인식된다.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다. 패한 쪽에 섰다면 다음 총선 공천은 물 건너간다. 이런 불안심리가 점을 부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역술인들에게도 대선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다. 한 후보에 대한 베팅이 성공한다면 다음 대선까지 이름값은 보장된다는 것. 한 역술인은 “정치적 선택에 따라 성패가 크게 갈리는 정치인의 속성상 일반인보다 점에 의지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