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 동아일보 기사] [책]'한국의 사회발전…' 펴낸 유석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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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국의 사회발전…' 펴낸 유석춘교수
한국사회의 대표적 보수 논객 중 한 사람인 연세대 유석춘 교수(사회학·47·사진)가 이른바 ‘패거리주의’로 비판받고 있는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주장을 내세운 저서 ‘한국의 사회발전:변혁운동과 지역주의’(전통과현대)를 내놓았다.
이 저서는 유 교수가 1986년 박사학위논문부터 최근의 언론 기고문까지 약 15년 간의 연구성과를 총정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학문적으로 밝힌 것이어서 논란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툭하면 정략적 이념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꼴보수’를 자처하며 온갖 사이버 테러에 시달리면서도 신문과 방송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의 생각이 궁금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12일 저녁 8시반,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카페에서 유 교수를 만났다. 근처 주점에서 학생들과 한 잔하고 왔다면서 언제나처럼 부시시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다. 인터뷰 약속을 하면서 ‘공격적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어 다짜고짜 공세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올해 선거에서도 지역주의 극복이 큰 과제가 될 텐데 이렇게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책을 내셔도 되는 겁니까?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지역주의는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지역주의를 비롯해 이른바 ‘학연 지연 혈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혈연으로 형성된 재벌이 없이 한국의 경제발전이 가능했겠습니까? 지연의 역할 없이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을까요? 서울대를 없애자는 말도 나오지만, 일류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학연이 한국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습니까? 이런 것이 바로 한국의 정치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 온 중요한 요소이고, 이 책은 그 증거를 15년 동안 모은 것입니다.”
-물론 사회에 합리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 그런 시스템을 대신해서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해서 혈연 지연 학연으로는 사회의 운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됐는데도 제 때에 합리적 시스템으로 대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IMF를 겪게 된 것이 아닙니까?
“정말 저도 IMF를 겪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던 게 아닌가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요.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IMF를 극복하겠다며 추진하는 정책을 보면서 제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을 갖게 됐지요. 현 정부가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한 일이 뭡니까? 공적자금 조성하고 시장에 적극 개입한 것이지요. 박정희 정부 때 했던 것과 똑같아요. 물론 기업경영은 좀더 투명해졌지만 재벌은 그대로 있어요.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식으로 해결해 간 거예요. 노무현 후보나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현 정부와 똑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서구식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있더라도 한국, 중국, 일본 뿐 아니라 이슬람국가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굴러가면서 상호작용을 하는 겁니다.”
-혈연 지연 학연의 긍정적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해도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에서는 그 폐해가 너무 오래도록 지속돼 왔습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우선 이를 극복하고 합리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점도 있긴 하지만 다들 글로벌 스탠더드와 합리적 시스템만 이야기하니까 저처럼 다른 관점을 강조하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자꾸 서구식으로만 하자는 걸 보면서 배알이 꼴려요. 이건 우리 정체성의 문제고, 자존심의 문제예요. 백 년 동안이나 바꿔보자고 했지만 실제로는 안 없어지고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자는 거예요.
호남사람들도 의식의 진보성과 보수성에서는 영남사람들과 비슷한 분포를 보이지만 정작 선거에서는 철저히 지역색을 따랐고 그것이 민주적 정권교체에 크게 기여했지요. 시민운동단체들이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격렬히 비판하는 것도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시민사회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전통, 즉 유교적 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혈연 지연 학연을 긍정하려면 그런 관계로 형성된 집단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 즉 강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선사후(公先私後)’를 생명처럼 여기는 도덕적 교양인을 키워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교육기간의 대부분을 그런 도덕교육에 쏟았던 조선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셈이 아닙니까? 지금처럼 대부분의 교육시간을 지식과 기술 교육에 할애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책임 있는 교양인을 키워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런 점에서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교육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정도는 그런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를 엘리트주의자라고 해도 할 수 없어요.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바로 도덕성을 가진 보수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왕 앞에서 목숨 걸고 할 말을 하는 지식인 몇 명만 있었어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밤 10시, 유 교수는 학문적 동지이자 같은 학교에 재직하는 함재봉 교수(정치학)와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자리를 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
◆ 유석춘 교수 약력
△중앙고,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 사회학 박사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겸 계간 ‘전통과현대’ 편집위원
△저서:‘막스 베버와 동양사회’, ‘발전과 저발전의 비교사회학’, ‘동남아시아의 사회계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