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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지금도 생생
비행기 6번 갈아타며 남아공行 혈전 끝 왕좌 어려서부터 복싱광…김기수 선배 영향 고2때 입문 | ||||||||||||||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1974년 7월 4일의 일이니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24살이던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에서 강호 아널드 테일러를 4차례나 다운 시킨 끝에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타이틀을 따내며 세계 챔피언 벨트를 처음 찼다. 기쁨도 잠시. 1년이 못돼 멕시코의 강타자 알폰소 사모라에게 타이틀을 잃고 재도전에서도 좌절을 곱씹어야 했다. 그러나 77년에는 파나마 헥토로 카라스키야와의 WBA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4번의 다운을 당하고도 3회에 역전 KO승으로 ‘4전5기’의 신화를 남기며 다시 정상에 섰다. 돌이켜보면 권투는 파란만장의 연속이자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복싱에 본격 입문한 것은 고2때(1967년)이지만 어려서부터 ‘복싱광’이었다. 어렸을 때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살았는데 복싱도장을 하던 김준호 선생님이 이웃이었다. 64년 타계하신 아버지가 복싱 관전을 즐겨 김 선생님이 자주 초청장을 보냈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복싱구경을 다녔다. 중학생 때 공부시간에 미국의 복싱 전문월간지 ‘링 (Ring)’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때마침 고1이던 66년 6월 김기수 선배가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세계챔피언이 됐다. 카퍼레이드가 벌어진 날 나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그때 “챔피언이 된다는 건 저렇게 근사한 일이구나!”라고 생각했고, 손을 흔드는 선배의 모습에 복싱세계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사를 가서 만나지 못한 김준호 선생님을 고2때 다시 만나 본격적인 선수로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평생 잊지 못할 첫 세계타이틀매치로 화제를 돌려보자. 69년 선수로 데뷔한 지 5년 만이자 72년 OPBF밴텀급 동양챔피언에 처음 오른 이후 2년 만의 세계 정상 도전 기회였다. 내가 동양챔피언이라곤 하지만 만만한 상대를 데려다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테일러가 나를 지명방어전 상대로 선택했기 때문에 성사된 경기였다. 트레이너 김준호 선생님과 함께 여섯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30여 시간에 걸쳐 남아공에 도착했다. 테일러가 링에 올라 손을 흔들자 홈 관중의 함성에 경기장이 떠나갈 듯했다. 김준호 선생님은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수환아! 저 자식 1회전에 조져버려, 알았지?” 나도 속으로 ‘알았어요, 조져버릴게요. 넌 오늘 나한테 죽었다’라고 되뇌었다. 1라운드 중반쯤 레프트훅을 강하게 내쳤고 묵직한 손맛이 제대로 걸렸다 싶었다. 오만방자 하던 테일러는 큰대자로 엎어졌다. 그러나 주심은 느림보 카운트를 했는데 싸울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5회에는 기회이자 위기를 맞았다. 두 번째 다운을 뺏었지만 ‘아차’ 하는 순간 테일러의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이 나의 왼쪽 귀를 찢어버린 것이다. 고막이 터진 것 같은 느낌에 피가 흘러내렸다.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킬 꼬투리를 잡으려고 우리 코너를 기웃거렸지만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너무나 허무했다. 선생님과, 틈만 나면 나를 경기장으로 데려 가셨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자식 놈 먹인다고 배가 불룩해지도록 옷 속에 버터를 숨겨 나오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테일러도 지쳤지만 나도 얼굴이 피로 물들었고 오른손 부상까지 당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펀치를 날렸다. 다행히 14라운드에서 테일러가 내 주먹에 걸려 넘어졌고 15라운드에서 한 번 더 다운을 뺏었다. 판정 끝에 내가 챔피언에 올랐다. 트레이너 선생님과 나는 링 위에서 미친 듯 트위스트를 춰댔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 내 머리에 방송사 헤드폰을 씌워줬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않은 통화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내가 복싱을 시작한 이후 김기수 선배 어머니를 가장 부러워하셨던 어머니는 “네가 내 소원 풀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귀에 피는?”, “피 안 나와, 괜찮아. 엄마 잘 있어 금방 갈게”,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생생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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