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의 생가-윤보선 대통령의 안국동 주택;중앙고 등 수많은 인재 배출한 교육의 중심 공간(출처:tong)
본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화장
경남 합천군 율곡읍 내천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
처음엔 이런모습이 아니었다.. 허름한 집이었는데..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돈 들여서
생가 내부
목포에서 두 시간 뱃길인 김대중 생가는 하의도 맨 끝으로 알려져 있다. 하의도 선착장이 있는 웅곡리 면소재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생가" 안내판을 따라 가면 후광리가 나온다. 후광 2구와 후광 1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형상으로 비쳐진다. 김대중 생가가 있는 곳은 거북이 머리 부분이다. 금거북이 진흙 밭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다.
이곳은 하의도 북동쪽 끝이자 후광 마을에서도 끝집이자 왼쪽 외딴집이다.
집터는 마을 뒷산에서 내려온 산능성의 끝 부분에서 반달 모양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999년에 복원한 생가는 반달 모양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집 뒤로 이어지는 산능성은 후덕하여 그곳 특산인 마늘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집 뒤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산(主山)은 높지 않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이곳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데 썰물 때에는 섬의 북동쪽에 있는 장병도와 갯벌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곳 김대중 생가터는 하의도의 맨 끝집이 아니라 장병도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원줄기이자 맨 첫 부분 왼쪽 능선 끝이다. 하의도 전체의 산들은 이곳 김대중 생가 우측 능선에서 이어져 나가는 꼴이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곳이며, 이전에는 인평대군이 살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 경무대로 옮기기 전까지의 2년 7개월과, 1960년 4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의 1개월 동안이다.
대지 1,820평의 이화장의 본건물은 ㄷ자 형태의 한옥이며, 부속 건물은 5평 남짓한 조각당(대한민국 초대 각료들을 선정한 곳)과 유족들이 생활하는 건물 등 총 세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70여 평의 본채에는 이 대통령 내외가 쓰던 침실·거실·서재·응접실 등 6개의 방과 주방·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화장은 낙산의 주봉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내린 용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낙산은 산세가 힘차고 단정하며, 서울의 명당수인 청계천이 역수가 되도록 하여 생기를 이루게 한다.
이화장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는 서울 남산이 청룡이며, 북악산이 백호, 인왕산이 안산으로서 사신사가 고루 갖추어진 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은 문필봉 형태를 이루고 있는 북악산인데, 북악산은 백호이면서 안산과 같은 역할을 하여 이화장을 향해 마주 보고 있음으로써 명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화장의 주택 평면은 터만큼 명당 구조를 이루지는 못한다. 이화장은 남쪽을 향해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ㄷ자 평면 형태는 중심력이 부족하다. 주택의 기운은 중심에 강력한 공간이 있어야 생기가 발생하는데, 지붕도 생기가 부족한 형태이다. 특히 낙산의 용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지세로 보면 서향으로 배치하는 것이 배산임수의 이론에 합당한데도 남향으로 배치, 생기를 저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세는 명당이지만, 건물 형태나 배치 방법은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았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거주하는 동안 재물이 모이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친 혈육을 보지 못했으며, 말년을 외국에서 어렵게 보내게 되는 데 집 형태 등 주택의 풍수가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안국동 주택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는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생가 터가 지척에 있는 등, 예로부터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특히 조선 시대 맹사성 대감의 주택이 있어 예전에는 맹현골로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또 주변에 구 경기고등학교(현재 정독도서관), 덕성여자중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창덕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즐비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육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도 얼마 전까지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김활란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박흥식 전 화신백화점 사장 등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던 곳이다. 현재는 윤보선 전 대통령 유가족들만 이곳에 살고 있다.
서울시 민속사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은 대지 1,411평, 건평 250평으로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로 구분되어 있다. 이 집은 1800년경 당시 권력층에 있던 민(閔)모 대감이 자신의 주택으로 축조했는데, 당시 주택의 규모가 너무 커서 고종 황제의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개화론자인 박영효가 이 집에서 살았고(1861~1939),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선친 윤치소씨가 매입해 살기 시작했다.
윤 전 대통령은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의, 일명 새말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10세를 전후해 이곳으로 이사온 후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줄곧 이 집에서 살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곳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이 집은 북한산의 큰 힘을 받은 말봉우리가 큰 용을 일으켜 남쪽, 즉 서울 시내를 향해 뻗어 내려가는데, 바로 생룡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강한 용은 강력한 추진력을 의미하며, 장룡은 오랫동안의 발복을 나타낸다. 윤 전 대통령이 정치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용의 생기에 힘을 입었다고 보여지며, 대통령직을 하야한 후에도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낸 것은 용의 강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집 마당에 서면 백호인 북악산이 매우 가깝게 솟아 집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북악산은 맹현골의 전반적인 지세에 있어서 주산인 동시에 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북악산은 그 형태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고, 강체의 목산으로 문필봉(文筆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필봉 기운은 선비의 지조와 중심 사상을 갖게 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 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모동 주택
이 집은 대한민국 제5대에서 제9대까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1917~1979)가 태어나서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생가 내에는 안채 및 사랑채와 1979년에 설치한 분향소가 있다. 건립 당시 안채는 초가였으나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분향소 박대통령께서 거쳐하시던 초가집 안채
박정희대통령은 고령 박씨 29세손으로 그의 선조는 고령에서 성주로 이거하였다가 1914년 현 위치인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원래 생가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주 뜨는 냄새와 서까래가 보이는 천장에 파리똥이 새까맣게 앉은 황토 벽으로 된 방에는 신문지 한 장도 바르지 않았다. 장대 두 개로 시렁을 지르고 그 위에 세간을 차려 놓고 사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토방(土房) 속에서 태어났다.
(정재경 1992 {위인 박정희} 집문당 35쪽)
메주 뜨는 냄새와 서까래가 보이는 천장에 파리똥이 새까맣게 앉은 황토 벽으로 된 방에는 신문지 한 장도 바르지 않았다. 장대 두 개로 시렁을 지르고 그 위에 세간을 차려 놓고 사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토방(土房) 속에서 태어났다.
(정재경 1992 {위인 박정희} 집문당 35쪽)
움푹하게 패인 대지에 동쪽만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빙 둘러쳐진 곳이어서 담을 쌓을 필요가 거의 없다.
… 여기서 박성빈은 온 가족과 함께 황토 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인 두 초가를 지었다.
안채는 북향.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박정희가 쓴 [나의 소년 시절]에는 '이 집은 6·25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원래의 안채는 一자 모양으로 부엌과 방 두개 사이로 마루방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도 방이 둘이었다.
그의 산실인 큰방은 2×3m 크기로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 사랑채 작은 방에는 정희가 상희 형에게서 물려받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지금도 놓여 있다.
가로 88cm, 세로 53cm 정도인데 서랍이 두개 달려 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는 외양간과 함께 소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렸던 부엌이 있다.
이 부엌의 한쪽 벽을 따라서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 통시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가구들을 가지고 추정하면 이 집안의 재산 목록은 장롱 하나, 놋쇠 화로 하나, 탈곡기 한대, 가마솥 몇 개, 밥상과 소반 몇 개, 숯불 다리미, 호롱불 등잔 서너개, 앉은뱅이 책상 하나, 식기와 옷가지들, 그리고 언문소설을 읽는데 썼던 백남의의 돋보기 하나, 가축으로는 닭이 대여섯 마리, 황소 한 마리, 박성빈 일가가 약목에서 이사 올 때 가져온 가구는 황소 한 마리의 등에 다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 여기서 박성빈은 온 가족과 함께 황토 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인 두 초가를 지었다.
안채는 북향.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박정희가 쓴 [나의 소년 시절]에는 '이 집은 6·25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 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 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원래의 안채는 一자 모양으로 부엌과 방 두개 사이로 마루방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도 방이 둘이었다.
그의 산실인 큰방은 2×3m 크기로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 사랑채 작은 방에는 정희가 상희 형에게서 물려받은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지금도 놓여 있다.
가로 88cm, 세로 53cm 정도인데 서랍이 두개 달려 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는 외양간과 함께 소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렸던 부엌이 있다.
이 부엌의 한쪽 벽을 따라서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 통시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가구들을 가지고 추정하면 이 집안의 재산 목록은 장롱 하나, 놋쇠 화로 하나, 탈곡기 한대, 가마솥 몇 개, 밥상과 소반 몇 개, 숯불 다리미, 호롱불 등잔 서너개, 앉은뱅이 책상 하나, 식기와 옷가지들, 그리고 언문소설을 읽는데 썼던 백남의의 돋보기 하나, 가축으로는 닭이 대여섯 마리, 황소 한 마리, 박성빈 일가가 약목에서 이사 올 때 가져온 가구는 황소 한 마리의 등에 다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래채(사진)
경북 구미시 상모리에 있던 박정희대통령의 생가. 66년에 찍은 당시 생가는 워낙 가난했던 탓인지 나무기둥도 없이 쌓아 올린 흙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하다.
왼쪽 처마 밑에 나란히 매달린 것은 풀어놓은 닭들이 알을 낳도록 만든 둥지. 현재 생가는 구미시가 새로 단장해 깔끔한 초가집으로 바뀌었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
노태우의 고향은 대구시 동구 신용동 용진 마을로 대구의 명산 팔공산의 한 자락 끝에 자리한다. 노태우의 전기에도 이곳 일대의 지세를 "한 마리의 큰 용이 도사리고 있는 듯하며" 특히 마을은 바로 "용의 머리"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보통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특히 노태우 생가는 용머리의 중심처에 자리한다.
처음엔 이런모습이 아니었다.. 허름한 집이었는데..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 돈 들여서
열심히 꾸며놓았다..
거제 장폭면 외포리 대계마을 1388-3번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태어나 13세까지 성장한 생가 작은 몽돌 밭이 있는 해안과 어울러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마을이 큰 닭과 같이 생겼다 하여 대계 마을로 불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
목포에서 두 시간 뱃길인 김대중 생가는 하의도 맨 끝으로 알려져 있다. 하의도 선착장이 있는 웅곡리 면소재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생가" 안내판을 따라 가면 후광리가 나온다. 후광 2구와 후광 1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을 바라보면 마치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형상으로 비쳐진다. 김대중 생가가 있는 곳은 거북이 머리 부분이다. 금거북이 진흙 밭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이다.
이곳은 하의도 북동쪽 끝이자 후광 마을에서도 끝집이자 왼쪽 외딴집이다.
집터는 마을 뒷산에서 내려온 산능성의 끝 부분에서 반달 모양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1999년에 복원한 생가는 반달 모양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집 뒤로 이어지는 산능성은 후덕하여 그곳 특산인 마늘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집 뒤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산(主山)은 높지 않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이곳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데 썰물 때에는 섬의 북동쪽에 있는 장병도와 갯벌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곳 김대중 생가터는 하의도의 맨 끝집이 아니라 장병도에서 이어지는 지맥의 원줄기이자 맨 첫 부분 왼쪽 능선 끝이다. 하의도 전체의 산들은 이곳 김대중 생가 우측 능선에서 이어져 나가는 꼴이다.
*노무현 현 대통령 생가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6번지의 봉하마을, 바로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진영읍에서 동북쪽으로 4.5㎞ 지점인 봉화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진영 단감과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곳이다.
봉화산에 봉수대가 위치하고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라 불리우게 되었다.
기자가 대통령 생가에 들어선 순간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했다. 대통령의 생가는 작은방 2개와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슬레트 지붕이 덮힌 아주 초라한 시멘트 벽돌집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하효성, 김영자 부부가 살고 있었고 연일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봉화산에 봉수대가 위치하고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라 불리우게 되었다.
기자가 대통령 생가에 들어선 순간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했다. 대통령의 생가는 작은방 2개와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슬레트 지붕이 덮힌 아주 초라한 시멘트 벽돌집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하효성, 김영자 부부가 살고 있었고 연일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태어난 방
출처 : Tong - 辛가네님의 그때시절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