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 전 기무사령관과의 生前 마지막 통화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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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 전 기무사령관과의 生前 마지막 통화
[최보식이 만난 사람] "令狀 기각돼 오늘 휴대폰 돌려받고… 세종시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기억 안 나지만 다 인정하겠다, 시시콜콜 따져봐야 소용없어
그 상황서 사령관이 해야 할 직무의 정당성·적법성 주장했다
나는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됐다. 경찰에서 확인했듯이 통화 시각은 7일 오후 1시 29분이었다.
내가 전화를 걸었고 긴 신호음 끝에 그가 나왔다.
"아, 최 기자님…."
"며칠 전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군요. 그때 휴대폰이 검찰에 압수된 상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예, 영장이 기각돼 오늘 휴대폰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동안 꼼짝 못 하다가 세종시에 있는 집사람(교사로 재직)이 바람도 쐴 겸 오라고 해서 지금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걱정 많이 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검찰에서 영장을 다시 청구하지는 않겠지요?"
"검찰이 이번에 영장이 기각된 대법관(박영대·고영한) 쪽으로 힘을 쏟지 않겠느냐고 변호사가 이야기는 했습니다…."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서 그가 말했다.
"실은 세종시에 가려고 막 집을 나서다가 제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분 전환도 하시고."
이게 생전의 마지막 통화였다. 1시간 20분 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시간 계산을 해보면 그때 그는 유서가 든 가방을 들고 자신이 살던 건국대 근처 오피스텔을 나서던 중이었던 것 같다. 이날 그는 자신의 변호인들에게도 "세종시에 내려가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세종시로 가지 않고 서울 문정동에 있는 지인의 사무실로 향했던 것이다.
내가 전화를 걸었고 긴 신호음 끝에 그가 나왔다.
"아, 최 기자님…."
"며칠 전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군요. 그때 휴대폰이 검찰에 압수된 상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예, 영장이 기각돼 오늘 휴대폰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동안 꼼짝 못 하다가 세종시에 있는 집사람(교사로 재직)이 바람도 쐴 겸 오라고 해서 지금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걱정 많이 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검찰에서 영장을 다시 청구하지는 않겠지요?"
"검찰이 이번에 영장이 기각된 대법관(박영대·고영한) 쪽으로 힘을 쏟지 않겠느냐고 변호사가 이야기는 했습니다…."
일상적인 대화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서 그가 말했다.
"실은 세종시에 가려고 막 집을 나서다가 제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분 전환도 하시고."
이게 생전의 마지막 통화였다. 1시간 20분 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시간 계산을 해보면 그때 그는 유서가 든 가방을 들고 자신이 살던 건국대 근처 오피스텔을 나서던 중이었던 것 같다. 이날 그는 자신의 변호인들에게도 "세종시에 내려가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세종시로 가지 않고 서울 문정동에 있는 지인의 사무실로 향했던 것이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은 생전에“기무사가 이렇게 국민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 조직이었나, 나로서는 자괴감과 회의감이 들 정도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DB
그는 박지만씨의 고교·육사 동기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누나'로 불렀다. 이 때문에 2014년 기무사령관으로 발탁됐을 때 여러 설이 돌았다. 마찬가지로 그가 1년 안 돼 경질됐을 때도 여러 풍문을 낳았다.
그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군에서 예편한 뒤였다. 그에 대해 '정치군인' 선입견이 있었는데 만나보니 단정한 학자 같은 인상을 받았다. 직접 만난 건 두 번이지만 통화나 문자 메시지로 가끔 연락하는 관계가 됐다. 내가 신문에 쓴 글을 보고 시국 걱정을 표시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취재 목적으로 그와 길게 통화한 적은 한 번 있었다. 7월 31일이었다. 나흘 전 문재인 대통령이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과 계엄령 검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구시대적이고 불법적 일탈 행위'라고 말하면서 국방부 특별수사단의 기무사 수사가 탄력을 받던 시점이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 의혹'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 같다. 우선 기무사 요원들은 왜 세월호 현장에 있었나?
"당시 해군 등 전군(全軍)에서 병력과 장비가 대거 투입됐다. 군 병력이 움직이면 당연히 기무부대도 파견된다. 현장에서 군 임무 수행과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고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는 게 역할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군의 역할은 컸고 이 안에서 기무사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 이는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기무사 요원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서 유족들의 정치 성향과 가족 관계, 음주 실태 등을 파악했고, 안산 단원고 학생을 뒷조사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군의 대민 지원과 관련된 여론과 동향을 파악 보고하는 것은 기무사의 직무에 해당된다. 이를 어떻게 민간 사찰이라 할 수 있나. 기무사는 민간 사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툭하면 그런 사건이 터졌고 이에 대해 문책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찰하라'는 지시는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직무 활동이 왜 민간인 사찰로 의심받게 됐다고 보나?
"지역기무부대는 대형 재난 상황 발생 시 구성되는 범정부대책위원회의 당연직 멤버다. 실종자 가족들의 불편, 불만 또는 요구 사항도 파악해야 한다. 실종자 가족대책위의 활동을 수첩에 적고 위에 보고한 것을 사찰로 오해한다. 더욱이 이를 '가족대책위에 대한 동향'이라고 하니까 사찰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는 정보기관 특유의 관행이다. 내가 '동향' '동정'이라는 오해받을 만한 표현을 쓰지 말고 '상황' '분위기'라고 고치라고 한 적 있었다."
―민간인에 대한 불법 도·감청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세월호 선사의 주인인 유병언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사용됐다. 법무부의 지원 요청으로 이뤄진 것이다."
―기무사령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하러 청와대를 자주 들어갔다는데.
"한 번도 없었다. 독대하고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때는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시스템이 없었다. 내 전임자 시절에도 없었다. 내가 나온 뒤로는 모르겠다."
―박지만씨 친구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누나'로 부르는 실세(實勢)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독대를 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 개인적인 연고를 들어 나를 엮으려고 한다. 1년 채 안 되는 기무사령관직은 군 생활에서 잊고 싶은 기간이다. 좋게 임기를 다 마친 것도 아니고 그 뒤로 무슨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현 정권에서 수사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다고 보나?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수사이니 언젠가는 나를 부를 것이다. 기무사가 비판과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이렇게 뭇매를 맞을 조직이었나, 이렇게 국민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 조직이었나, 잠시나마 사령관을 맡았던 나로서는 자괴감과 회의감이 들 정도다."
―현 정권에서 벌어지는 소위 '적폐 수사'에서 대부분 인사들이 자기 입장을 밝히지도 못하고 구속됐다. 언론 보도는 검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다. 일방적 주장이 기정사실처럼 된다.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당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지 않겠나?
"기무사의 세월호 사건에서 내가 최종 지휘관인데 잘못 대응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가거나 직접 나설 상황이면 그렇게 하겠다."
이 통화가 있고 넉 달 뒤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에 출두하면서 "모든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라고 말했다. 영장은 기각됐고, 나흘 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변론을 맡았던 석동현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검찰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당초 소환 조사를 할 때 검찰은 앞으로 어떤 조사를 할 것인지 통보했다. 이 중에는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비록 풀려났지만 장차 검찰이 주변까지 먼지 떨이식 수사를 벌일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컸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다. 군에서 예편한 뒤였다. 그에 대해 '정치군인' 선입견이 있었는데 만나보니 단정한 학자 같은 인상을 받았다. 직접 만난 건 두 번이지만 통화나 문자 메시지로 가끔 연락하는 관계가 됐다. 내가 신문에 쓴 글을 보고 시국 걱정을 표시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취재 목적으로 그와 길게 통화한 적은 한 번 있었다. 7월 31일이었다. 나흘 전 문재인 대통령이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과 계엄령 검토는 그 자체만으로도 있을 수 없는 구시대적이고 불법적 일탈 행위'라고 말하면서 국방부 특별수사단의 기무사 수사가 탄력을 받던 시점이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기무사의 세월호 유족 사찰 의혹'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 같다. 우선 기무사 요원들은 왜 세월호 현장에 있었나?
"당시 해군 등 전군(全軍)에서 병력과 장비가 대거 투입됐다. 군 병력이 움직이면 당연히 기무부대도 파견된다. 현장에서 군 임무 수행과 관련된 문제를 파악하고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는 게 역할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군의 역할은 컸고 이 안에서 기무사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 이는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기무사 요원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서 유족들의 정치 성향과 가족 관계, 음주 실태 등을 파악했고, 안산 단원고 학생을 뒷조사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군의 대민 지원과 관련된 여론과 동향을 파악 보고하는 것은 기무사의 직무에 해당된다. 이를 어떻게 민간 사찰이라 할 수 있나. 기무사는 민간 사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툭하면 그런 사건이 터졌고 이에 대해 문책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찰하라'는 지시는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직무 활동이 왜 민간인 사찰로 의심받게 됐다고 보나?
"지역기무부대는 대형 재난 상황 발생 시 구성되는 범정부대책위원회의 당연직 멤버다. 실종자 가족들의 불편, 불만 또는 요구 사항도 파악해야 한다. 실종자 가족대책위의 활동을 수첩에 적고 위에 보고한 것을 사찰로 오해한다. 더욱이 이를 '가족대책위에 대한 동향'이라고 하니까 사찰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는 정보기관 특유의 관행이다. 내가 '동향' '동정'이라는 오해받을 만한 표현을 쓰지 말고 '상황' '분위기'라고 고치라고 한 적 있었다."
―민간인에 대한 불법 도·감청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는 세월호 선사의 주인인 유병언의 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사용됐다. 법무부의 지원 요청으로 이뤄진 것이다."
―기무사령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하러 청와대를 자주 들어갔다는데.
"한 번도 없었다. 독대하고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때는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시스템이 없었다. 내 전임자 시절에도 없었다. 내가 나온 뒤로는 모르겠다."
―박지만씨 친구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누나'로 부르는 실세(實勢)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독대를 했을 것으로 본다.
"그런 개인적인 연고를 들어 나를 엮으려고 한다. 1년 채 안 되는 기무사령관직은 군 생활에서 잊고 싶은 기간이다. 좋게 임기를 다 마친 것도 아니고 그 뒤로 무슨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현 정권에서 수사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다고 보나?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진 수사이니 언젠가는 나를 부를 것이다. 기무사가 비판과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이렇게 뭇매를 맞을 조직이었나, 이렇게 국민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 조직이었나, 잠시나마 사령관을 맡았던 나로서는 자괴감과 회의감이 들 정도다."
―현 정권에서 벌어지는 소위 '적폐 수사'에서 대부분 인사들이 자기 입장을 밝히지도 못하고 구속됐다. 언론 보도는 검찰을 통해서 나오는 것들이다. 일방적 주장이 기정사실처럼 된다. 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당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지 않겠나?
"기무사의 세월호 사건에서 내가 최종 지휘관인데 잘못 대응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가거나 직접 나설 상황이면 그렇게 하겠다."
이 통화가 있고 넉 달 뒤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그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에 출두하면서 "모든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라고 말했다. 영장은 기각됐고, 나흘 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변론을 맡았던 석동현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검찰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당초 소환 조사를 할 때 검찰은 앞으로 어떤 조사를 할 것인지 통보했다. 이 중에는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비록 풀려났지만 장차 검찰이 주변까지 먼지 떨이식 수사를 벌일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컸을 것이다."
/뉴시스
―검찰 조사 과정에서 세월호 사건과 상관없는 '별건(別件) 수사'가 있었나?
"그는 군에서 예편한 뒤 블록체인 개발 회사의 고문을 맡았는데, 그 회사로부터 현재 거주하는 오피스텔을 받았다. 검찰이 오피스텔을 압수 수색하면서 그 사실을 알아내고 이에 대해 심문했다. 바로 다음 날에는 그 회사와 오피스텔 명의자에게 전화를 걸어 '왜 제공해줬느냐?'고 캐물었다. 불안해진 회사 측은 그에게 '오피스텔을 비워 달라'고 했다. 그도 자신의 문제로 회사에 불똥이 튈 것을 걱정했다. 영장실질심사 전날까지 그는 집을 구하러 다녔다."
―이를 두고 검찰이 '별건 수사'를 했다고 할 수 있나?
"오피스텔은 그와 회사 간의 계약이었고, 세월호 사건 조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물론 검찰은 '수사까지 할 계획은 없었다'고 발뺌할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전역 이후 복잡한 정치 상황과 얽혀 제대로 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금 모처럼 여러 비즈니스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 이런 일이 발생해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 누구나 모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특히 정도가 심한 게 있었나?
"검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부하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한 적이 있느냐?' '지시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지요?'라는 식으로 모두 진술하게 한 뒤 심지어 이를 직접 그의 손으로 쓰게 했다. 그리고 두세 시간 뒤 이 진술과 상반된 문건을 내밀며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그 검사는 나름대로 뛰어난 심문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일반 형사 잡범을 상대로 그렇게 해왔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조사받는 피의자라 해도 기본 예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나. 담당 검사는 30대고, 피의자는 군에서 평생을 바친 예비역 3성 장군이었다.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이게 무엇이냐?'고 심문하는 게 상식 아닐까. 사실 사령관은 수많은 지시와 보고를 받는 자리다. 몇 달간 지속적으로 올라온 세월호 사건의 모든 보고서에 설사 그의 서명이 있었다 해도 다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검찰 심문 과정에 직접 배석을 했나?
"후배 변호사가 배석했고 나는 보고를 다 받았다. 메모까지 갖고 있다."
―영장실질심사에서는 직접 변론을 했는데.
"검찰은 그 시기의 기무사 서버를 모두 들여다본 것 같았다. 실질심사 과정에서 검찰은 '6·4 지방선거 이전 국면 전환을 위한 출구 전략 마련' 등과 같은 정치적 해석의 소지가 있는 기무사 보고서를 화면에 띄우면서 설명했다. 그런 뒤 그가 출세 목적으로 세월호 유족 동향을 사찰하도록 지시했다고 연결지었다."
―지금 검찰은 위험한 집단이 됐다. 그는 어떻게 대응했나?
"기억이 안 나지만 조직에서 이런 지시와 보고가 있었다면 다 인정하겠다고 했다. 시시콜콜 따져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사령관이 해야 할 직무의 정당성과 적법성만 주장했다. 급박했던 당시의 행위를 지금 와서 범죄로 취급하는 게 옳은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당하는 것을 '운명'이라 해야 하는가."
검찰 조사에서 모멸과 압박감을 느꼈다고 해서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는 남아 있는 가족이나 친구, 선후배들에게 슬픔을 안겼다.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잠을 못 이뤘다.
"그는 군에서 예편한 뒤 블록체인 개발 회사의 고문을 맡았는데, 그 회사로부터 현재 거주하는 오피스텔을 받았다. 검찰이 오피스텔을 압수 수색하면서 그 사실을 알아내고 이에 대해 심문했다. 바로 다음 날에는 그 회사와 오피스텔 명의자에게 전화를 걸어 '왜 제공해줬느냐?'고 캐물었다. 불안해진 회사 측은 그에게 '오피스텔을 비워 달라'고 했다. 그도 자신의 문제로 회사에 불똥이 튈 것을 걱정했다. 영장실질심사 전날까지 그는 집을 구하러 다녔다."
―이를 두고 검찰이 '별건 수사'를 했다고 할 수 있나?
"오피스텔은 그와 회사 간의 계약이었고, 세월호 사건 조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물론 검찰은 '수사까지 할 계획은 없었다'고 발뺌할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전역 이후 복잡한 정치 상황과 얽혀 제대로 되는 일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금 모처럼 여러 비즈니스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 이런 일이 발생해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 누구나 모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특히 정도가 심한 게 있었나?
"검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부하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한 적이 있느냐?' '지시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지요?'라는 식으로 모두 진술하게 한 뒤 심지어 이를 직접 그의 손으로 쓰게 했다. 그리고 두세 시간 뒤 이 진술과 상반된 문건을 내밀며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그 검사는 나름대로 뛰어난 심문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일반 형사 잡범을 상대로 그렇게 해왔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조사받는 피의자라 해도 기본 예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나. 담당 검사는 30대고, 피의자는 군에서 평생을 바친 예비역 3성 장군이었다.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이게 무엇이냐?'고 심문하는 게 상식 아닐까. 사실 사령관은 수많은 지시와 보고를 받는 자리다. 몇 달간 지속적으로 올라온 세월호 사건의 모든 보고서에 설사 그의 서명이 있었다 해도 다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검찰 심문 과정에 직접 배석을 했나?
"후배 변호사가 배석했고 나는 보고를 다 받았다. 메모까지 갖고 있다."
―영장실질심사에서는 직접 변론을 했는데.
"검찰은 그 시기의 기무사 서버를 모두 들여다본 것 같았다. 실질심사 과정에서 검찰은 '6·4 지방선거 이전 국면 전환을 위한 출구 전략 마련' 등과 같은 정치적 해석의 소지가 있는 기무사 보고서를 화면에 띄우면서 설명했다. 그런 뒤 그가 출세 목적으로 세월호 유족 동향을 사찰하도록 지시했다고 연결지었다."
―지금 검찰은 위험한 집단이 됐다. 그는 어떻게 대응했나?
"기억이 안 나지만 조직에서 이런 지시와 보고가 있었다면 다 인정하겠다고 했다. 시시콜콜 따져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사령관이 해야 할 직무의 정당성과 적법성만 주장했다. 급박했던 당시의 행위를 지금 와서 범죄로 취급하는 게 옳은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당하는 것을 '운명'이라 해야 하는가."
검찰 조사에서 모멸과 압박감을 느꼈다고 해서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는 남아 있는 가족이나 친구, 선후배들에게 슬픔을 안겼다.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잠을 못 이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09/2018120901605.html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이재수 전 국군 기무사령관. 검찰은 이례적으로 이 전 사령관에게 수갑을 채워 포토라인 앞에 세웠다. /뉴시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0/20181210001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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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 교우(68회)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 이 글을 올립니다.
맨 아래 사진은 다른 기사의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