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동아닷컴>
본문
[파워인터뷰]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
주대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이 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1층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앞에 섰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통해 평등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독특한 점”이라면서 “경자유전의 원칙을 밝힌 제헌헌법이 바로 인촌 사랑방에서 기초됐다” 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세계은행이 2003년 낸 정책 연구보고서가 있다. 건국 초기 토지 분배 상태가 평등할수록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았다. 대토지 소유를 해체하지 못한 남미 국가들, 필리핀 등은 풍부한 자원에도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한국은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해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 왔던 것이 문제’라고 했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의 유전자다.”
―농지개혁이 어째서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나.
“평준화로 인해 교육을 받고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수백 년 만에 자신의 땅을 가진 농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장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했다. 자립의 의지를 물려받은 자영농의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현대적 학문과 과학기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대농장주의 자식은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업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그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 경제 발전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에 못 박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 제정 이전 이미 건국헌법(제헌헌법)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제86조)고 규정했다. 헌법 초안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탁을 받고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기초한 것이었다. 유진오는 농지개혁 등 4대 원칙을 포함한 초안을 인촌에게 건넸고, 설명을 들은 인촌은 전적으로 찬성했다. 유진오는 대지주인 인촌이 적극 찬성하자 사심 없는 그의 통찰력에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인촌은 농지개혁법 제정 당시 “농지개혁은 삶의 설계를 새로 짜는 계기가 돼야 한다. 우리 민족의 도약의 기회이므로 이를 꼭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주 부회장은 “대한민국은 농림부 장관이었던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고 인촌 김성수 선생이 도운 농지개혁이 성공하면서 유례없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농지개혁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헌헌법에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정한 곳이 인촌 사랑방이다. 유진오 교수는 인촌이 키운 사람이다. 최남선이 손병희 선생의 뜻을 받들어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것처럼 젊은 유진오가 인촌의 뜻을 받들어 헌법을 기초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기초위원회 소속 국회의원과 전문위원 절반이 인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이자 호남의 대지주인 인촌이 농지개혁의 대세를 받아들이니, 다른 지주들도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대인들이 농지개혁의 효과를 예상했을까.
“남로당이나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고 ‘예방혁명’을 종용하던 미국, 대세를 받아들인 한민당, 주요 실행자였던 이승만과 조봉암 그 누구도 농지개혁이 가져올 심대한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70년 뒤 영국과 프랑스에 견줄 만한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주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에서 ‘인촌 정신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인촌은 근대 한국인의 모범이고 전형”이라면서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을 꼽아 달라.
“이승만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조만식 등 5명이다. 이승만 김성수는 당연하고, 해공 신익희는 임정계에서 떨어져 나와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계 시각으로 보면 배신자겠지. 죽산도 조선공산당 입장에서는 배신자다. 둘 모두 미군정 정보당국에서 일주일 이상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아마 미군정 당국이 세계 정세나 미국이 가진 정보를 제공하면서 깊은 대화를 했던 거 같다. 죽산과 해공의 참여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든든해졌다.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선생은 포함돼야 한다.”
―인촌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죽산을 공부하다가 인촌을 만나게 됐다. 인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치적 유언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인촌 사후 죽산이 민주당 창당에서 배제되면서 진보당을 창당하고 고립돼, 끝내는 사법살인을 당했다. 인촌은 100년 전 조선 사람 가운데 실로 드물게도 근대인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위정척사파류의 선비형 지식인이 아닌 코즈모폴리턴 세계시민이었고, 허세와는 거리가 먼 실용주의자였다. 모두가 비분강개하기만 할 때 인촌은 조용히 인재를 기르고 실질적인 일을 했다. 청년들에게는 유학비를 대서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라고 했다. 도산 선생이 절규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실력 없이 무슨 독립을 하나? 독립을 말로 하나? 도산의 절규에 가장 충실하게 답한 사람이 인촌이다.”
주 부회장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애썼던 이들의 노력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산은 건국유공자 서훈을 못 받았는데….
“유족이 낸 서훈 신청을 국가보훈처가 3번이나 보류했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 김원봉은 서훈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주 잘못된 얘기다. ‘건국’훈장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느냐도 평가해야 한다. 약산의 서훈은 통일이 되면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서훈 거부 이유는 무엇인가.
“1941년 매일신보에 아주 작은 기사가 있다. 인천의 조봉암이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거다. 실제로 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일신보는 지금 북한 노동신문이나 마찬가지인 총독부 기관지다. 그런 신문의 기사를 법률적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죽산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다.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1939년 나온다. 고문으로 손가락 7개를 잃었다. 출소한 뒤 인천의 후배들이 먹고살라고 죽산에게 왕겨를 취급하는 비강조합장 자리를 마련해 줬다. 죽산은 감옥살이하고 일제에 노출된 사람이다. 만약에 죽산이 강요에 못 이겨 헌금을 실제 냈다고 치더라도, 죽산이 이를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에서 살지 말라는 얘기다. 광복 뒤에 반민특위에서도 죽산은 거론된 적이 없다. 일제강점 말기 광란의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이 구성한 반민특위에서도 조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분들을 그런 문제로 모욕하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농지개혁에 비견될 만한 오늘날 시급한 개혁과제는….
―당대인들이 농지개혁의 효과를 예상했을까.
“남로당이나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으려고 ‘예방혁명’을 종용하던 미국, 대세를 받아들인 한민당, 주요 실행자였던 이승만과 조봉암 그 누구도 농지개혁이 가져올 심대한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70년 뒤 영국과 프랑스에 견줄 만한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주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에서 ‘인촌 정신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인촌은 근대 한국인의 모범이고 전형”이라면서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인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을 꼽아 달라.
“이승만 김성수 신익희 조봉암 조만식 등 5명이다. 이승만 김성수는 당연하고, 해공 신익희는 임정계에서 떨어져 나와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계 시각으로 보면 배신자겠지. 죽산도 조선공산당 입장에서는 배신자다. 둘 모두 미군정 정보당국에서 일주일 이상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아마 미군정 당국이 세계 정세나 미국이 가진 정보를 제공하면서 깊은 대화를 했던 거 같다. 죽산과 해공의 참여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든든해졌다.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에서 월남한 이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선생은 포함돼야 한다.”
―인촌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죽산을 공부하다가 인촌을 만나게 됐다. 인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죽산을 배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치적 유언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인촌 사후 죽산이 민주당 창당에서 배제되면서 진보당을 창당하고 고립돼, 끝내는 사법살인을 당했다. 인촌은 100년 전 조선 사람 가운데 실로 드물게도 근대인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위정척사파류의 선비형 지식인이 아닌 코즈모폴리턴 세계시민이었고, 허세와는 거리가 먼 실용주의자였다. 모두가 비분강개하기만 할 때 인촌은 조용히 인재를 기르고 실질적인 일을 했다. 청년들에게는 유학비를 대서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을 배워 오라고 했다. 도산 선생이 절규했다.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실력 없이 무슨 독립을 하나? 독립을 말로 하나? 도산의 절규에 가장 충실하게 답한 사람이 인촌이다.”
주 부회장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애썼던 이들의 노력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산은 건국유공자 서훈을 못 받았는데….
“유족이 낸 서훈 신청을 국가보훈처가 3번이나 보류했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약산 김원봉은 서훈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주 잘못된 얘기다. ‘건국’훈장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느냐도 평가해야 한다. 약산의 서훈은 통일이 되면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서훈 거부 이유는 무엇인가.
“1941년 매일신보에 아주 작은 기사가 있다. 인천의 조봉암이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거다. 실제로 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일신보는 지금 북한 노동신문이나 마찬가지인 총독부 기관지다. 그런 신문의 기사를 법률적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죽산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다.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했고,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1939년 나온다. 고문으로 손가락 7개를 잃었다. 출소한 뒤 인천의 후배들이 먹고살라고 죽산에게 왕겨를 취급하는 비강조합장 자리를 마련해 줬다. 죽산은 감옥살이하고 일제에 노출된 사람이다. 만약에 죽산이 강요에 못 이겨 헌금을 실제 냈다고 치더라도, 죽산이 이를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에서 살지 말라는 얘기다. 광복 뒤에 반민특위에서도 죽산은 거론된 적이 없다. 일제강점 말기 광란의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이 구성한 반민특위에서도 조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분들을 그런 문제로 모욕하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농지개혁에 비견될 만한 오늘날 시급한 개혁과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타파와 연금개혁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굉장히 고용이 안정되고 대우가 좋으며 노조의 보호도 받는 운 좋은 소수와 전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크다. 일부 노동자층은 마치 소지주처럼 지대를 수취하는 듯한 입장이다. 반대로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은 과거 소작농과 같은 처지에 내몰려 있다. 이를 혁파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