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를 관통하는 암스텔 강변은 평온했다. 흐르는 강물에 카누를 띄우고 몸을 맡긴 사람, 강변 풀밭을 애완견과 함께 거니는 중년 부부…. 강가에 위치한 머큐어호텔 1층 로비에서 權五坤(권오곤·54) 「舊(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관을 기다렸다. ICTY가 있는 헤이그市는 암스테르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데, 네덜란드 정부기관이 몰려 있는 정치 중심도시이다.
2001년 3월 權재판관은 유엔 임시총회에서 ICTY의 14명 상임 재판관 중 한 명으로 당선됐다. 한국 법조인이 국제사법기구 재판관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유엔 사무차장급 대우를 받는다. 연봉은 2억원 정도라고 한다.
4년 임기를 마친 2005년, 再選(재선)됐다. ICTY는 「완료계획」에 의해 2010년까지 모든 재판을 마칠 예정이다. 權재판관은 2009년 임기가 만료되더라도 ICTY의 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1년 더 재판에 임하게 된다.
약속시간에 맞춰 캐주얼 차림의 權五坤 재판관이 나타났다. 네덜란드에 오기 전 그와 몇 차례 통화를 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법복을 입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편해 보였다.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인 밀로셰비치 前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을 포함한 160여 명의 戰犯(전범)재판을 맡고 있는 판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戰犯재판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權재판관은 『네덜란드 커피 맛이 아주 좋다. 천천히 얘기하자』며 커피를 주문했다.
『밀로셰비치는 심장병 악화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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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심리 중인 權五坤 재판관(가운데). |
─2006년 3월 밀로셰비치 前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ICTY 감옥에서 突然死(돌연사)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독살說(설)이 제기되었는데요.
『독살설은 말이 안 돼요.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어요. ICTY는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재판소 관계자도 모르게 밀로셰비치가 재판 지연을 위해서 혈압약이 듣지 않게 하는 약물을 투여했습니다. 그게 악화돼 사망했습니다. 「국가원수에 대한 최초의 전범재판」이라는 역사적 선례를 남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게 안타까워요』
─만약 밀로셰비치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요.
『그 부분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유고슬라비아 전범재판이라는 게 워낙 방대하고, 서로 복잡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죠. 밀로셰비치는 다른 사건의 피고인과 관련돼 있어서 재판 결과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밀로셰비치는 「발칸반도의 도살자」로 불렸는데, 실제로 접해 본 느낌은 어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한 악명으로 재판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판사는 모든 사건을 백지상태에서 봐야 해요. 피고인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죠. 편견이 들어가면 재판에 영향을 주게 돼요. 그에 대한 나쁜 얘기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추가로 말씀드릴 필요 없겠죠. 다만, 세르비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카리스마가 강한 독재자」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쨌든 재판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사망했는데 현재 재판상황은 어떻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160여 명의 피고인 중 110여 명에 대한 재판이 끝났다고 보면 됩니다』
─현재 맡고 있는 재판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재판관 선출 직후부터 밀로셰비치 재판을 담당해 왔습니다. 밀로셰비치가 사망한 이후에는 보스니아內에 있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과 관련한 7명의 피고인 재판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 재판은 2006년 8월부터 시작했는데 앞으로 2년 정도는 지나야 판결이 선고될 것 같아요. 그 밖에 ICTY 완료계획에 따라, 상대적으로 경미한 사건을 보스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등 발칸국가의 국내법원에 송부할 사건을 결정하는 일을 맡고 있고, ICTY 규칙개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재판 맡아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입니까.
『1995년 7월 보스니아內 스레브레니차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사건을 말합니다. 세르비아계가 유엔보호구역인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후 약 1주일 동안에 보스니아 이슬람교도 남자 8000여 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학살에 총책임이 있는 것으로 기소된 카라지치 대통령과 믈라디치 軍 총사령관은 아직 도망 중이지만, 포포비치 등 그밖의 군대 및 경찰 책임자 등이 관련돼 있어요.
이 사건은 7명의 피고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사건이라 법정을 개조했지요. 재판 도중 재판관의 유고로 재판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비재판관을 두고 있습니다』
유고 내전 戰犯들의 격렬한 법정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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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坤 재판관이 영어로 동시통역되는 사건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
─ICTY의 재판 중에 밀로셰비치를 포함한 4명의 전범이 사망했고, 세르비아 급진당 당수를 지낸 보이슬라브 세셸은 옥중단식을 벌였습니다. ICTY의 피고인 관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밀로셰비치 외에 구금 중 자살한 사람이 한 명(도크마노비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 명,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밖에 刑(형) 확정 후 刑 집행 중 증인으로 소환됐다가 자살한 사람이 한 명(밀란 바비치) 있습니다. 자살한 두 사람은 불행한 일이지만 조사결과 어찌할 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기소된 사람 중에 이곳으로 잡혀 오기 전 사망해 공소가 취소된 사람이 20명 정도 됩니다』
─유고 내전의 戰犯들이 고분고분 재판을 받는 것은 아니군요.
『「보이슬라브 세셸」은 자발적으로 헤이그로 와서 구금되었는데, 자수 이유는 오로지 「ICTY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재판 진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변호인 없이 혼자 재판에 임했어요. 그래서 ICTY가 강제로 변호인을 선임했는데, 이에 반대해 단식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고함을 쳤고, 재판소 규칙을 무시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제출했어요.
최근 상소심 판결에 의해 변호인 없이 자신이 직접 방어할 권리를 회복받은 후 단식을 풀었습니다. 이 상소심 판결은 국제형사법계로부터 「피고인의 단식에 무릎을 꿇은 타협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요.
한국에서 변호인 선임이 강제되는 사건의 경우, 피고인이 변호인 선임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소송을 수행하겠다고 할 경우 이를 인정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재미있는 이슈입니다』
金正日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은 가능할까? ─밀로셰비치와 북한 金正日을 「국제법을 위반한 독재자」라는 점에서 동일한 인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金正日이 국제사법기구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을까요.
『金正日이 우리 국민에 대해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것은 당연하죠. 예를 들어 「아웅산 테러사건」이나 「KAL기 폭파사건」이 金正日의 책임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범죄이므로 당연히 처벌할 수 있어요. 문제는 상설 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처벌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항구적인 것이든 임시적인 것이든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다루는 통상의 戰犯은 무력충돌, 즉 전쟁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反인도적 범죄」 등을 주요 재판 대상으로 다룹니다. 金正日이 북한內에서 이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요.
『무력충돌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에 대해 광범위하거나 조직적인 공격으로 살인·노예화·추방·구금·고문·강간, 정치적·인종적·종교적 사유에 기한 박해, 기타의 非인도적 행위에 대해서 국제형사재판소는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反인도적 범죄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이론上 국제법정에서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살인·구금·고문 등이 「광범위하거나 조직적인 공격」에 의해 이뤄졌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되겠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북한 金正日은 처벌하기 어렵다고 봐요. 북한이 ICC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굳이 처벌한다면, 유엔 안보리 등에서 국제사회가 동의해 ICTY와 같은 특별재판소를 만들어 金正日을 법정에 세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죠』
權五坤 재판관은 『북한 金正日 문제에 대해서는 향후 법적 연구가 필요하다』며 『ICTY의 재판관으로서 범죄 혐의에 대한 사전 조사 없이 세부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증인들이 암살당하는 경우 가끔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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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코소보 사태 당시 세르비아 정부軍의 공격으로 부상당한 주민을 나토軍이 응급처치하고 있다. |
─유고 戰犯들을 옹호하는 쪽에서 테러위협을 가한 경우는 없습니까.
『직접적인 테러는 없었어요. 임명 초기 밀로셰비치 담당 재판관은 신변안전을 위해 경호원 두 명을 뒀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다닙니다. 하지만 현직 총리(세르비아의 진지치)가 암살당하고, 증인이 암살당하는 경우가 가끔씩 있어 재판소 경비는 심한 편이죠.
정문부터 보안검사가 대단해요. 일반인이 법정에 들어갈 때는 다시 한 번 보안검사를 거쳐야 해요. 방청석과 법정 사이에는 방탄유리가 설치돼 있어요. 유리를 통해 법정 상황을 볼 수 있지만, 소리는 헤드폰을 통해 듣습니다』
─ICTY와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같은 건물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ICTY가,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있는 평화궁 건물에 있는 줄 알아요. ICTY는 평화궁 건물로부터 바닷가 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보험회사 건물을 개조해 재판소로 쓰고 있습니다. 건물에는 재판부·검찰·사무국이 함께 입주해 있습니다. 건물이 협소해 부근의 건물 두 채를 추가로 쓰고 있죠』
權五坤 재판관은 『ICTY 법정과 한국 법정은 구조부터 다르다』고 했다. 權재판관에 따르면, 법정 중앙에 재판관 4명이 방청석을 향해 앉아 있고, 그 앞 밑줄에 사무국 직원·재판연구관·廷吏(정리)가 앉는다고 한다. 검사석(2~3명의 검사와 보조요원)은 방청석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변호인석은 왼쪽에 있다. 변호인단 뒤로 양복으로 정장한 7명의 피고인들이 앉아 있는데, 이들 옆에 경비요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재판에 참여하는 법률가들은 모두 법복을 입는데 재판관들은 붉은색, 나머지 사람들은 검은색 법복을 입는다. 붉은색 법복을 입은 재판관과 시커먼 법복을 입은 20여 명의 변호인단이 우르르 몰려 있는 장면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재판상황 발칸지역에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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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TY 법정에 들어서고 있는 밀로셰비치. |
법정 양쪽에는 통역요원들의 부스가 설치돼 있다. 증인석은 방청석 바로 앞쪽에서 재판부를 향해 앉게 돼 있다. 방청객은 증인의 얼굴이나 증언하는 모습을 방청석 내에 설치돼 있는 모니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법정 내에는 방송용 카메라가 7대 설치돼 있으며, 방송은 발칸지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매일 재판을 해요. 일단 한 사건을 시작하면 그 사건이 끝날 때까지 맡지요. 물론 본안 재판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재판이 시작되기 전의 준비절차 사건들은 여러 건을 동시에 진행하죠. 예전에는 재판을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하루 종일 했는데, 요즘은 한 법정을 두 재판부가 나눠 쓰기 때문에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뉩니다. 오전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45분까지, 오후반은 오후 2시15분부터 오후 7시까지 재판을 해요. 이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5시간씩 재판합니다』
─재판은 영어로 진행됩니까.
『법정 공식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고인과 증인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語(BCS)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통 3개 국어가 실시간으로 통역됩니다.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은 리모콘으로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코소보 관련 사건에서는 알바니아語가 포함됩니다. 저는 영어를 선택해 듣는데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사람으로서 언어 스트레스가 상당해요. 대화를 집중해야 들을 수 있고, 특히 대화자 모두 BCS를 사용할 경우 한 사람의 통역요원이 「Question」, 「Answer」라고 구분하면서 한 문장씩 통역하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는데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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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舊유고 지역에 파견된 UN軍이 장갑차를 이용해 크로아티아 내전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재판이 끝나면 그날 재판기록과 다음날 준비절차 기록을 읽어야 하고, 수시로 들어오는 신청사건에 대해 재판관들과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지요.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몸은 녹초가 됩니다.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와인 한잔 마시고 나면 곧 잠들어 버리죠.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某 고위법관에게 「이곳 재판이 바쁘게 돌아간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외교관 생활 같은 것 아닌가요」 하시더군요. 외교관 생활에 대한 오해 여부는 차치하고도 이곳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재판을 제대로 맡기 위해서는 건강관리에 유의해야 해요.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골프장에 나가 혼자 라운드를 합니다. 그러면 다소 피로가 풀립니다』
─네덜란드의 일상생활은 어떻습니까.
『재판은 힘들지만 한국보다 여유롭고, 덜 쫓기고, 평화스럽게 지낸다고 할까요? 직장 동료와 회식하는 경우도 드뭅니다. 두 달에 한 번씩 재판관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 정도면 회식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재판관들은 점심을 각자 먹어요. 저는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해결합니다.
생활 자체는 단조롭지요. 가끔씩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가 선택해서 이곳에 왔고, 재판도 흥미로워 인생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하고 있지요』
─ICTY 재판관으로서 1기(初選)와 2기(再選)를 비교한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1기와 2기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임기 4년이 지나 재선됐지만, 업무는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현직 재판관 중에 잠비아 출신의 판사가 은퇴했고, 이집트 출신의 판사가 재선에 나섰으나 낙선해 상임 재판관 14명 중 2명이 바뀌었어요. 밀로셰비치가 2006년 3월에 사망했으니 개인적으로는 볼 때 밀로셰비치 재판 시절을 1기, 이후의 시기를 2기라고 할 수 있겠죠』
『운이 좋았다』 權五坤 재판관은 『2001년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족한 제가 과분한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국력과 대법원·외교부의 적극적인 배려, 유엔대표부와 세계 각국에 파견돼 있는 외교관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에 운 좋게 제가 당선된 겁니다』
─선거운동은 어떻게 했습니까.
『두 가지 형태로 진행했어요. 하나는 외교부가 주도하는 공식 선거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엔대표부 외교관들이 각국 외교관들을 상대로 하는 운동이었어요. 한국은 과거 유엔에서 남북대결의 역사를 가졌던 탓에 선거에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답니다』
權五坤 재판관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로비(lobby)」라는 말의 유래를 실감했다고 한다.
『유엔총회장 뒤편에 있는 일명 「인도네시아 라운지」에서 각국 외교관들이 활발한 미팅을 벌였어요. 라운지는 넓은 로비에 응접세트를 몇 개 놓은 곳입니다. 우리가 테이블에 앉아서 로비를 하고 있는 동안, 옆의 다른 응접세트에서 다른 나라 후보들이 또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만나 로비를 했습니다. 30분 단위의 약속시간이 끝나면 서로 상대방을 교환하며 로비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아프리카·中南美의 소규모 국가 외교관을 집중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들은 본국의 영향을 덜 받는 외교관들이었어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한국 인삼차가 맛있는데, 몇 통 얻어 줄 수 있느냐」는 애교 있는 부탁부터 「얼마 후에 한국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한국 정부 측에서 체재비를 부담해 줄 수 없느냐」는 등의 다소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았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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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사무총장(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지난 2월 ICTY를 방문해 權五坤 재판관 일행과 기념촬영을 했다. |
평화회의에 못 들어간 李儁 열사의 恨이 출마 계기 ─국제사법기구의 재판관으로 출마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국제분야에 남보다 관심이 많았지요. 청와대 파견근무, 헌법재판소 연구부장, 법원행정처 법무담당관, 기획담당관 등을 하면서 세상의 다른 면을 보려고 노력했어요. 당시 저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한국 법조인이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독일에서 유학을 하던 동료 판사가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을 다녀온 후 기행문을 이메일로 보내왔어요.
동료 판사는 「이준 열사 기념관」 관장에게서 「예전에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 못했듯이, 지금의 평화궁에 한국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평화궁에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중국인ㆍ일본인 판사가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인 판사는 한 명도 없다」는 얘기를 기행문에 적었던 겁니다. 그 글을 감명 깊게 읽고 바로 2~3일 뒤에 법원행정처로부터 ICTY 재판관 후보자 추천 공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도전했죠』
네덜란드와의 깊은 인연 權五坤 재판관은 『우리 집안은 네덜란드와 인연이 깊다』고 했다. 權재판관의 부친 權寧福(권영복·82) 옹이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필립스社에서 인사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외국 유학을 하신 것도 아닌데 영어를 아주 잘하셨어요.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시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일제시대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앞으로 영어를 잘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해요. 그 덕에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미군 통역을 했어요. 전쟁 후 통신사에 잠시 근무했고, 이후 외국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외국인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어요. 이런 점이 저로서는 영어와 외국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는 사실은 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필립스社가 1970년대 초 한국에 진출했을 때부터 10여 년간 필립스에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을 했어요. 이후에는 駐韓 네덜란드대사관에 입주해 있던 「네덜란드 해외투자청」의 고문으로 다시 10여 년간 근무했지요. 그런데 제가 네덜란드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우리 집안이 전생에 네덜란드와 무슨 인연이 있나 봐요』
─權재판관은 서울法大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사법시험에서 수석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때도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부모님은 3남1녀를 두셨는데, 아버지는 늘 저희들에게 「월급쟁이가 아닌 전문가가 되라」고 강조하셨어요. 교육열은 서울大 불문과를 나온 어머니가 남달랐죠. 그 덕분인지 여동생은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고 있고, 그 아래 남동생은 삼성의료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막내는 국방대학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으니,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자식 농사는 나름대로 성공하신 셈이죠』
─어릴 때 꿈이 법조인이었습니까.
『고등학교 때는 토인비와 같은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했죠.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면서 많은 재미를 느끼게 되었어요. 딱딱한 법조문과 어려운 문장을 다뤄야 하지만, 결국은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거기에 인생관이 있고 철학이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법조인이 되었죠』
─학창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습니까.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1972년 朴正熙 정권의 유신체제 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학생운동하는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지만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바뀌는 건가 봐요, 독재자이긴 하더라도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1979년 판사로 임관한 후 얼마 되지 않아 10·26을 맞았는데, 당시 법조계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1979년 9월 서울민사지방법원 배석판사로 발령을 받았어요. 두 달이 되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했어요. 당시 저는 동료 판사들과 술집에서 「길거리에는 탱크가 오가고 있는데, 우리들은 지연 이자가 연 5푼의 민사 이자가 되어야 할지, 연 6푼의 상사 이자가 되어야 할지를 논하고 있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했어요』
초년 판사 시절 청와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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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72학번) 재학 시절의 權五坤 재판관. |
─新군부가 권력을 휘두르던 1980년 청와대에서 근무를 시작하셨더군요.
『1980년 11월19일로 기억합니다. 그날 청와대 관계자가 당시 부장판사님께 전화를 했어요. 곧이어 법원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權판사, 청와대로 가야겠어」 하시는 겁니다. 영문도 모른 채 저는 다음날부터 청와대로 출근했죠. 3년여에 걸친 청와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어요.
저는 「방위」로 병역을 마쳤기 때문에, 동기생들이 법무관으로 근무할 때에도 판사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늑대」를 피한다는 것이 결국 「호랑이」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청와대 손진곤 비서관이 친구인 박철언 비서관에게 저를 추천했다고 해요』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당시 全斗煥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입법기구를 만들어 소위 「개혁입법」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이를 추진하기 위해 청와대內에 법조팀을 만들어 정무수석(우병규)과 민정수석(이학봉)을 공동위원장으로 임명했지요. 청와대에 파견근무 중인 법조인 비서관(김두희·김유후·박철언·손진곤)을 위원으로 하는 「법제위원회」가 설치됐고, 그 하부 조직으로 「법제연구반」이 있었습니다.
검찰에서 강재섭·김영진 검사, 법제처에서는 박원출·김희성 법제관 그리고 법원에서 제가 차출돼 초기 멤버로 참여했어요. 당시 저는 주로 법원 관련 입법 작업을 했는데, 「임대차보호법」과 피해자의 배상명령신청 제도를 담은 「소송촉진특례법」 등을 주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청와대 파견근무는 판사의 관료화 초래』 權五坤 재판관은 청와대 근무 시절 법원 예산을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법시설특별회계(사특예산)」라는 게 있었어요. 사특예산은 벌금 등으로 조성한 수입의 50%를 법원·검찰·경찰이 1:4:5의 비율로 나누어 시설예산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우병규 정무수석의 지원 아래, 「법원 몫이 타 기관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는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요.
全斗煥 대통령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검찰과 경찰의 몫으로부터 각각 0.5%씩 줄여 배분비율을 법원 2, 검찰 3.5, 경찰 4.5로 변경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화들짝 놀란 검찰과 경찰이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해, 결국 경제기획원의 조정으로 일반예산으로부터 특별회계로 가져오는 몫을 50%에서 55%로 늘리고, 그 늘린 부분을 모두 법원에 주는 것으로 결론 났지요. 결국 15:38:47로 변경됐는데, 이렇게 늘어난 예산으로 법원의 서초동 이전이 가능했습니다』
─현직 판사·검사가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현직 판사나 검사가 청와대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심지어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판사는 법복을 입고 재판을 할 때 판사이지, 행정기관에서 일하게 되면 상명하복 관계에 놓이기 때문에 판사의 관료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청와대에 근무할 때 박철언 비서관과 손진곤 비서관에게 「(법원에) 사표를 내고 근무하겠다」고 했습니다. 청와대 생활이 3년 정도 돼갈 무렵 미국 유학을 이유로 「법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요청했고, 법원 복귀 후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 갔어요』
─청와대 근무를 후회합니까.
『청와대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저를 「정치판사」로 치부한다면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청와대에 있는 동안 판사로서 품격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법원에 복귀한 뒤 재판을 하면서 양심에 反하는 결정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아요.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우수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개인적으로 국가를 보는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외교담당 비서관으로 계셨던 이장춘 대사에게서 「한국의 대법관이 아니라 세계의 대법관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들은 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국은 피고인의 인권보호 취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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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미국 하버드大 로스쿨 유학 시절 가족과 함께. |
─미국 하버드大 로스쿨 생활은 어땠습니까.
『대화식으로 이뤄지는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현직 판사가 지도하는 「지역 법원의 역할」이라는 세미나에 자주 참가했어요. 매주 법원을 정기 방문해 그곳 판사들과 얘기하고, 판사 바로 옆에 앉아 재판을 방청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85년 한국에 돌아와 민사단독 판사를 하면서 이런 경험을 살려 동료 판사 5명과 돌아가며 남의 재판을 하루 종일 방청하고, 다음 날 점심시간에 만나 동료의 재판진행에 관해 의견을 나눴죠. 서로 가르쳐 주고 배웠던 겁니다』
─판사 본연의 직책 외에 많은자리를 섭렵했는데.
『청와대 3년, 법원행정처 2년, 헌법재판소 2년…. 「외도」를 많이 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력 때문에 판사로서의 자세를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재판만 담당했더라면 접할 수 없었던 경험을 많이 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봐요』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해 검찰 고위인사들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하는 등 「글로벌 기준으로서 인권보호」에 관심이 많더군요.
『우리 형사사법제도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수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세계적 기준에서 볼 때, 모자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의 묵비권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고, 피의자의 자백에 치중하는 「규문주의적」 수사방법에 의존하고 있어요.
또한 무기대등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제대로 존중되지 않거나, 검찰 측 증거를 재판 전에 피고인 측에 알려 주는 증거開示(개시)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 않아 피고인의 방어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사법제도는 그 나라의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유럽연합(EU) 신규가입時 가장 중요한 심사기준 중의 하나가 「후보 국가의 사법제도가 공정한 재판과 적법절차를 보장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모든 면에 걸쳐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형사재판과 수사의 실무가 세계적인 인권기준에 부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검찰은 英·美의 「당사자주의적 검찰」의 지위에, 대륙법계 국가에서의 수사판사가 갖는 권한까지 보유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는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해 한국 법조계는 「공판중심주의」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공판중심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형사재판이 공개된 법정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공개재판의 원칙상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판중심주의는 우리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견이 있는 것은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오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검찰이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뿐만이 아니라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까지 재판 전에 피고인 측에게 제공하는 것은 범세계적인 원칙입니다.
공판중심주의는 어디까지나 진실을 발견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英·美에서도 복잡한 사건의 경우, 서면 진술서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만약 소송서류를 공개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굳이 법정에서 다시 말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李儁 열사 순국 100주년의 감회 ─작년 법조비리 사태 이후 서울중앙지법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됐고, 판사와 변호사는 전화통화를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 외형적인 것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923년 영국 판례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의는 행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원칙이 있어요. 실제로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공정성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는 오해를 없애는 게 중요해요. 법관은 검사나 변호인을 밀실에서 만나 괜한 불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ICTY의 경우, 검사와 재판관들이 같은 건물에 근무하고 있지만, 검사의 출입증으로 재판관실을 출입할 수 없어요. 사건의 필요에 의해 당사자를 만나야 할 때에는 참여사무관의 입회 아래 당사자를 만나되, 면담기록을 남기게 돼있습니다』
─올해는 대한제국의 첫 법조인이었던 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ICTY 재판관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국제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유엔의 수장을 배출했으니 실로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어요. 특히 법조 大선배라고 할 수 있는 이준 열사가 참석을 거부당한 바로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헤이그협약」이 체결됐습니다. 그 협약으로부터 유래됐다고 할 수 있는 「전쟁범죄에 관한 국제법규」를 적용하는 저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요.
100년 전 이준 열사 일행의 헤이그 활동을 지원했던 영국 언론人 윌리엄 스테드는 미국의 철강재벌 카네기를 설득해 평화궁을 만들게 했는데, 앞으로 평화궁에 근무하는 한국인 재판관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이제 국제화는 필연적입니다. 젊은 법조인이라면 국제기구에 도전해야 해요. 흔한 말이지만 「세계는 정말 넓고, 할 일이 많습니다」』●
▣ 「발칸의 도살자」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포자레바크 출생으로 1989년 5월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大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유고연방이 해체되자 개별 독립국가內에 있는 세르비아계를 지원했고, 내전을 주도하며 「인종청소」를 벌였다.
그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민족주의를 고취시켰으며,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를 내세웠다.
ICTY는 1999년 5월 그를 전쟁범죄·학살죄·反인도적 범죄 혐의로 사건 기소했다. 밀로셰비치가 주도한 대표적 유혈 사태는 「크로아티아 내전」(1991~1995년·20만 명 사망),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1992~1995년·10만 명 사망), 「코소보 사태」(1998~ 1999년·1만 명 사망 90여만 명 난민 발생)이다. 발칸반도에서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자 밀로셰비치는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다.
밀로셰비치는 2000년 민중봉기로 실각된 후, 2001년 4월 세르비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2001년 7월 헤이그로 이송돼 온 후 2002년 2월부터 ICTY의 재판을 받아 오다가 2006년 3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 舊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란? 제네바협약 위반, 전쟁범죄, 인종학살 등 反人倫 범죄 처벌 유고 內戰 뒤처리 위한 특별재판소 ICTY(舊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목적과 관할권은 명칭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ICTY는 「1991년 1월1일 이후 舊유고슬라비아 영토 내에서 발생한 중대한 國際人道犯罪(국제인도범죄)에 책임 있는 개인을 형사소추하기 위한 국제재판소」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유엔헌장 제7장의 비상 권한에 근거해 1993년에 창설했다.
ICTY가 처벌하는 범죄는 「제네바협약 위반」, 「전쟁범죄」, 「인종학살」 그리고 「反人倫的 범죄」 네 가지이다. ICTY의 관할·구성 및 범죄의 구성요건 등은 安保理가 의결한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재판절차와 증거법은 재판소 자체의 독자적인 규정에 따른다.
ICTY 상임 재판관 수는 16명이다. 그중 2명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의 판사로 선출되어 상소심을 담당하는 ICTY의 상소부에 배속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ICTY의 재판관 수는 14명이다. 14명의 재판관 중 5명은 ICTR 소속 판사 2명과 함께 상소부를 구성하고, 나머지 9명은 3명씩 나뉘어 3개의 재판부를 구성한다.
상임 재판관의 임기는 4년이고, 再選될 수 있다. 판사가 임기 중에 사망·사임 등을 하면, 유엔 사무총장이 安保理와 협의해 잔여임기 동안 근무할 후임자를 임명한다. 지금까지의 선례를 보면 전임자와 동일 국적자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최근에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 27명의 임시 재판관을 선출했다. 임시 재판관은 특정 사건의 재판에만 관여할 수 있는데 再選되지 않는 점을 빼고는, 상임 재판관과 동일한 권한을 가진다.
상임 재판관 3명으로 구성된 1개 재판부는 2~3개 섹션으로 나뉘어 상임 재판관 1명과 임시 재판관 2명 또는 상임 재판관 2명과 임시 재판관 1명으로 1개 섹션을 구성한 다음, 1심 재판을 맡는다.
ICTY의 규정에 의하면, ICTY 재판관은 각국 내에서 최고법원 판사로 선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후보가 될 수 있다. 재판관은 유엔총회에서 투표로 결정된다. 유엔총회 선거에서 유엔 회원국의 재적 과반수의 표를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