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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이 오는 11월이면 헐립니다. 동대문운동장이라고 일반적으로 호칭하지만 아마도 제 또래, 40대 중반 이상의 올드팬들은 서울운동장이라고 지금도 부르고 그 명칭에 추억과 정을 느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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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은 본래 1925년 10월 일제 시대 때 동대문 앞 성터에 최초의 국내 종합체육 시설로 개장됐습니다. 성동원두(城東原頭-성 동쪽 들판)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1962년에 보수공사로 야구장, 배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이 국제 규모의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1966년에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어져 2만2700석 규로로 확장됐고 야간 조명 시설이 마련됐으며 1968년에 메인스타디움과 육상경기장의 모습이 갖추어졌습니다.
강남 개발과 함께 1982년에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자 서울종합운동장이란 명칭이 잠실로 넘어갔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은 청계천 복원과 도심 개발에 따라 메인스타디움은 지난 2003년에 철거돼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변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야구장도 우여곡절 끝에 철거가 확정돼 앞으로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할 예정입니다.
지난 3월 19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신상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동대문야구장을 철거하고 대체 야구장을 건립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대체 야구장은 고척동에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대회 개최 규모의 야구장과 난지동 2곳, 구의동, 신월동, 공릉동, 잠실동 등 7곳에 간이 야구장을 건설키로 했습니다.
이제 서너 달 후면 사라지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추억이 가장 많았던 대회는 고교야구대회였습니다. 동대문야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고교야구대회인 제 37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8월3일부터 18일까지 열리니 감회가 각별한 이곳에 많이 찾아 주길 바랍니다.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부근 성동구(현재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난 저는 누구보다 동대문운동장 추억이 애틋합니다.
야구를 사랑한 많은 분들이 동대문야구장에 대한 추억이 있겠으나 감히 제 나름대로 동대문야구장에 관련한 추억과 명승부전 10꼭지를 정리해봅니다.
1. 야구장 담 넘어 구경가기
6.25 전쟁으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갔다가 1년 후 환도한 저는 장충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인근 청구국민학교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진
배트와 헌 공을 얻고 아버지가 동대문시장에서 사다 준 고물 글러브를 끼고 야구를 동네 친구들과 함께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6년 8월에 처음으로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해 인기를 끌었고 저도 새로운 학생야구에 눈을 떴습니다. 이듬 해 제 2회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이 왔을 때는 배수찬이란 뛰어난 투수가 눈부신 역투를 펼친 게 생생합니다.
그리고 제 3회 방문 때는 나니와 상고의 4번타자 장훈이 호쾌한 홈런을 날리는 장면을 직접 보고 두고두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장훈이 온 뒤 두어 달 지난 1958년 10월에 미국 메이저리그의 명문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광복 후 처음으로 미국 프로야구팀으로 방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백네트 뒤 본부석에서 구멍 뚫은 그물 사이로 한국대표팀 포수 김영조에게 시구를 했고 2만여 명의 대관중이 환호하던 모습이 어제 일같습니다.
세기의 장타자 스탠 뮤지얼의 2루타 등이 불을 뿜어 감탄했고 그래도 배용섭-김양중이 역투해 예상을 깨고 0-3, 적은 점차로 패한 게 신기했으며 성기영, 김희련, 박현식, 장태영, 김정환, 김진영, 진원주, 허정규 등 당대 명선수들의 플레이가 돋보였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동대문운동장을 제대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야구장은 외야석 가운데 뒷담장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시구문 건너편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에는 대장간과 철물점이 즐비했고 그 뒷편에 중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중국인 집 지붕을 타고, 눈치를 보며 높이 3m 가량되는 제법 높은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기어 올라 넘어갔죠.
장훈이 방문했을 때는 야구장 공사 관계로 경기는 육상장에서 임시방편으로 열렸고 홈런 펜스는 장애물 경기 때 사용하는 허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육상장에 몰래 들어가려면 운동장 동쪽에 위치한 서울경찰기마대 담장을 넘어서 다시 수영장 담을 넘어가야 하는 고난도의 담치기가 필요했습니다.
2. 서울운동장 흙을 밟아보다
담치기의 재미에 빠지고 야구공(홍큐) 한 개라도 잡아볼까 해 열심히 서울운동장을 찾았으나 사실 야구공을 얻기는 쉽지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파울볼이 관중석으로 날아가면 장내 스피커에서는 예쁜 아나운서 누나의 목소리가 즉각 나옵니다. " 관중 여러분 파울볼에 조심하세요. 잡으신 파울볼은 바로 선수들에게 돌려주세요. "
공을 돌려주지 않으면 대한야구협회가 고용한 동대문시장에서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이 관중석으로 쫓아올라가 수색작전을 벌이고 공이 그라운드에 되돌아 떨어질 때까지 경기가 중단됩니다. 만일 파울볼이 운동장 밖으로 아예 날아가 을지로 차도에 떨어졌다면 야구협회 직원들이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가 차도를 누비고 공을 찾아옵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이 같은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중고등학교 선수들은 으레 야구공을 꿰매서 썼고 살짝 부러진 배트는 못질해 사용했으며 성인야구의 최고봉인 실업야구팀에서도 하루에 새 공을 3~5개 정도만 썼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서울운동장 흙을 직접 밟아본다는 게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서울중학을 거쳐 서울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우리 팀이 서울고교팀 중에서도 중간 아래 수준이어서 전국대회는 출전해 보지 못하고 1학년 가을에 처음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추계리그전에 나갔는데 그 때 감격(?)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 직전에는 경동고가 이재환-백인천-오춘삼 트리오의 맹활약으로 32연승무패를 구가하며 전국을 떵떵거렸고 제가 공을 주으러 다닐 때는 성동고의 백수웅, 동산고의 최관수, 부산고의 김소식, 경동고의 김충남-김설권, 휘문고의 김병우, 경기공고의 김태령-이종술, 선린상고의 한동화-김충, 중앙고의 김옥수-하갑득, 대구상고의 정동진-유영수 등이 맹활약했습니다.
3. 처음으로 일본을 이긴 날
그날 친구들과 함께 시청 뒤 중국집에서 맛난 만두를 두둑하게 사고 운동장 앞에서는 말린 오징어를 봉투에 넣은 다음 일찌감치 외야석 가운데에 자리잡았습니다. 몇 달 있으면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그래도 그날은 우리가 일본을 이길 것 같은 감이 들어서 고교 3년생들이 단체 입장을 한 것입니다.
1963년 9월 25일 제 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차리그 일본과의 경기가 열리던 날, 서울운동장에는 2만5000여 관중이 꽉 들어찼습니다.
1회초 수비에서 유격수 재일동포 박정일의 에러로 한점을 내주어 장내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박현식이 베테랑답게 제가 앉은 근처에 장쾌한 동점홈런을 쳤습니다. 그리고 재일교포 배터리 신용군-서정리가 잘 던지고 잘 때려 5-2로 쾌승,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야구에서 일본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2차리그 일본전에서는 김응룡이 투런홈런 등 혼자서 3타점을 뿜으며 3-0으로 완승, 아시아 정상에 최초로 올라섰습니다.
4. 고교야구대회 전성시대
1960년대 들어 고교야구대회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청룡기대회(조선일보 주최), 황금사자기대회(동아일보 주최), 부산 화랑대기대회(국제신보 주최)에 이어 1967년에 대통령배대회(중앙일보 주최)가 새로 생겨 더욱 붐을 이루었습니다.
선도 주자는 경북고였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히트앤드런 등 기동력야구와 팀배팅을 도입한 서영무 감독은 걸출한 좌완 임신근과 조창수, 강문길 등 인재를 발굴해 '경북고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제 1회 대통령대회 결승에서 선린상고를 3-0으로 누르고 우승한 경북고는 제2 회 대회서도 준결승에서 경남고와 연장 10회 접전 끝에 조창수가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트려 1-0으로 이기고 결승에선 배문고에 6-1로 낙승해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경북고는 서울에서 열린 3개 대회 모두를 석권해 고교야구에 서울과 인천, 부산세에 이어 경북야구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음을 알렸습니다.
5. 전국팀 총출동 봉황대기 탄생…경북고 5관왕
고교야구 인기가 날로 치솟자 1971년에 봉황대기대회(한국일보-일간스포츠 주최)가 생겼습니다. 전국 모든 고교야구팀이 방학 때 빠짐없이 참가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정부에서도 고교야구대회가 너무 많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가를 해주었습니다.
임신근에 이어 남우식, 황규봉을 배출한 경북고는 그 해 첫 대회였던 대통령배대회 결승에서 김정수가 역투한 부산고에 1-0으로 신승한 다음 청룡기대회서는 경남고와의 결승에서 천보성의 결승타로 1-0으로 힘겹게 우승했습니다.
대구 문교부장관기대회서 동산고를 꺾고 우승한 경북고는 화랑대기대회서는 황규봉이 쾌투하며 부산상고를 6-1로 완파해 패권을 차지하고 새로 생긴 봉황대기대회서는 참가 37개팀 중에 마지막 상대로 서울의 대광고와 만났습니다. 남우식과 이동한이 투수전을 벌인 이날 경북은 6회초에 천보성이 또 결승타를 때려 1-0으로 승리, 초록봉황대기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지구별초청대회(황금사자기)에선 계형철과 윤몽룡이 계투한 중앙고를 6-0으로 완파하고 5개 전국대회를 모조리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6. 윤몽룡의 만루홈런 시비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에서 분패한 중앙고의 윤몽룡은 1972년 청룡기대회 준결승에서 경북고를 만납니다. 기교파 윤몽룡은 2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고 김승수가 적시타를 때리며 4-1로 승리해 황규봉에게 설욕하고 팀에 최초로 청룡기를 안겼습니다.
그 해 전국 41개팀이 총출동한 봉황대기대회서 윤몽룡-김승수 배터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결승까지 진출해 상대적으로 약팀으로 평가받던 배명고와 대결했습니다.
2만5000관중이 만원을 이룬 가운데 윤몽룡은 6회말 만루홈런을 날려 팀이 4-1로 앞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만루홈런이 왼쪽 라인을 넘어갔느냐 아니냐로 30여분간 실랑이가 벌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결국은 홈런으로 판정됐습니다만 시간을 끌다가 등판해서인지 윤몽룡이 판정시비 후 얻어맞았습니다. 결국 김정남과 김용윤이 계투한 배명이 8회초 4점을 뽑아 7-5로 역전승을 거두는 대이변이 벌어져 한동안 화제가 됐습니다.
7. 군산상고의 역전 드라마
역전승하면 위의 드라마보다는 두 달 앞서 열린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에서 군산상고-부산고의 대결입니다.
군산상고는 위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아 '스마일 투수'란 애칭이 붙은 송상복이 위력적인 피칭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12안타를 내주었습니다.
부산고는 편기철-조규철이 이어 던지고 3회초에 김일환이 2루타를 때리며 3-1로 앞섰습니다. 패색이 짙던 9회말 군산상고는 선두 6번 김우근의 안타에 이어 1번 김일권이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을 얻어내고 2번 양기탁이 동점 2타점 적시타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3번 김준환이 회심의 끝내기 좌전적시타를 날리고 3루수 주루방해까지 얻어 팀 창단 3년만에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군산상고의 우승으로 서울운동장 맞은편과 동대문시장, 장충단 소주집은 호남 사람들로 밤새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8. 선동렬-박노준-박동희의 추억
광주일고의 선동렬은 3학년 때인 1980년 대통령배대회서 팀의 5번 타자 겸 투수로 출전해 김태업과 이순철이 투타로 나선 광주상고와 결승서 만나 8-2로 승리하며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봉황대기대회서는 1회전에서 경기고를 만나 전원 탈삼진, 15개 탈삼진을 기록하며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초고교급 투수진이라고 평가를 받은 선린상고의 박노준-김건우 콤비는 1981년만큼은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청룡기대회 결승서 경북고와 만난 선린상고는 연장 11회 5-6으로 분패했고 화랑기대회서는 신일고에 연장 12회까지 접전 끝에 2-3으로 패해 우승기를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봉황대기대회서는 성준과 류중일이 뛰던 경북고를 다시 만나 4-6으로 져 세 번째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박노준 개인으로는 더구나 이 결승전 1회말에 슬라이딩하며 홈에 뛰어들다 왼발목이 접히며 발목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아픔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박노준이 중상을 당하자 그가 입원한 한국병원에는 수많은 여학생 팬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위문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크게 보도돼 최초의 '여학생들의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최동원과 선동렬을 이을 대형 투수로 점찍힌 부산고의 박동희는 1985년 봉황기대회부터 명성을 날렸습니다.
중앙고와 휘문고를 연거푸 완봉한 박동희는 결승에서 광주상고 신동수와 맞대결해 3-1로 승리, 우승을 따냈습니다. 1실점했으나 비자책점으로 대회 평균자책점 0을 기록했습니다.
9. 이종도의 실업야구 1000호 홈런과 프로 개막전 만루홈런
1972년 10월에 한국일보 기자로 저는 사회부를 거쳐 1976년 봄에는 체육부로 옮겼습니다. 당시 성인야구는 고교야구보다 인기가 처졌지만 1976년에는 롯데의 가입으로 실업팀이 10개팀으로 늘어났고 그 덕분에 관중도 하루 5000명을 상회했습니다. 최고 인기는 선수 아닌 김동엽 롯데 감독의 현란한 제스처와 커다란 목소리였습니다.
재미가 붙기 시작한 실업야구를 위해서 무얼 취재할까를 고민하다가 마침 실업야구 기록이 정립된 1964년 이후 통산 1000호 홈런 기록이 나올 즈음이란 사실을 알고 4월 7일에 서울운동장을 아침 일찍부터 갔습니다.
공군-제일은행의 첫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공군 소속이던 이종도가 1000호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단독으로 '이종도 1000호 홈런'이란 표제로 기사를 크게 게재해 야구팬들에게 기록의 값어치를 알리고 눈길을 끌었던 게 생각납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MBC 청룡에 입단한 이종도는 3월 27일 서울운동장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또 한번 일을 저지릅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열린 삼성-MBC전에서 이종도는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려 청룡에 11-7, 승리를 선사하고 프로야구의 성공 팡파레를 울렸습니다.
10. 휘문고와 덕수상고의 우승
프로야구가 잠실구장에서 열려 고교야구 인기가 쇠퇴한 가운데도 동대문야구장에서는 새로운 팀들이 명문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1907년에 창단해 한국고교야구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휘문고는 김병우 등 명투수를 배출했으나 고교 무대에서는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하다가 1994년 제49회 청룡기대회서 장충고와 결승전에서 대결해 감격의 우승을 따냈습니다. 주역은 2년생 정통파 투수 김선우였습니다. 김선우는 완투하며 5피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고 3회에 볼넷으로 걸어나가 첫 득점을 올렸고 6회엔 투런호머도 날려 5-2로 승리, 팀 창단 87년만에 우승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덕수상고는 1986년 청룡기대회 준결승전에서 난적 서울고에 4-3으로 신승하고 결승에서는 대전고에 4-2로 역전승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덕수상고는 1994년 황금사자기대회서 경남고를 7-1로 꺾고 8년만에 패권을 차지한 다음 그 해 봉황대기대회서는 배명고에 4회초까지 0-4로 뒤지다가 9회말에 6-5로 역전승하며 2관왕을 차지해 서울의 새로운 명문고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제 동대문야구장은 8월 3일부터 열리는 봉황대기를 끝으로 고교야구대회는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8월 30일부터 9월 20일까지 거행되는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전과 9월 28일~10월 3일에 벌어지는 제 1회 도시대항 사회인야구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장합니다.
추억의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에 예전의 추억이 계속 남아 우리가 보러 갈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일평 OSEN 편집인
< 사진 위 > 이승만 대통령(사진 원내)이 1958년 10월 21일 메이저리그 명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초청경기 식전 행사로 그라운드에 서 있는 김영조 포수에게 백스톱 구멍으로 시구하고 있는 광경. (사진 출전 KBO 편찬 < 한국야구사 > )
< 사진 가운데 > 전두환 씨가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에 앞서 시구하고 잇는 모습.
< 사진 아래 >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6개구단 선수들이 입장식을 하고 있는 장면(사진 출전 KBO 편찬 < 한국프로야구 20년사 > )
<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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