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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60회 작성일 2012-02-15 10:21
[ESSAY] 쨍 하고 해 뜰 날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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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쨍 하고 해 뜰 날

이민재 중소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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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2.14 23:03 | 수정 : 2012.02.15 04:15

icon_img_caption.jpg 이민재 중소기업인
"어두운 밤 강추위 속에서

나를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

아뿔싸, 30년 전 고교 동창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에 차 안에서 내내 침묵만

친구야! 미안하구나

겨울 지나면 또 봄이 오겠지 그때까지 늘 웃으며 살자…"


지난 설을 며칠 앞두고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가까운 지인과 서울 종로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술을 마셨다. 마지막 잔을 비울 무렵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고, 주차해 놓은 종로구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기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어둠 속에 서서 떨고 있었다.

"기사분이세요?" 그에게 다가가 물어본 순간,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어딘가 낯이 익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옛날 서울 계동의 교정(校庭)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갔다.

"○○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아뿔싸,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난 것이었다.

icon_img_caption.jpg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서로 얼떨떨한 가운데 반가운 덕담을 나눈 것도 잠시, 갑자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한 사람은 손님 입장에서, 다른 한 사람은 대리기사 입장에서 30년 만에 조우했으니 누군들 어색하지 않겠는가! 이제 와서 다른 대리기사를 부르겠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함께 차에 타자니 그 불편함을 어떻게 견딜지 막막했다. 잠시 서 있다가 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자동차 키를 건네줬다. 종로에서 여의도 집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자동차 안에서 네다섯 마디 대화를 띄엄띄엄 나눴다.

친구는 군에서 제대하고 한 은행에 들어갔다고 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시작한 사회생활이었지만 개인사정 때문에 15년 전에 그만뒀고, 지금은 낮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 밤에 대리운전 기사로 힘겨운 '투잡' 생활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인생의 곡절과 사연을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혹여 나의 말 한마디에 친구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무슨 질문을 하기도 조심스러웠고, 친구도 나만큼이나 대화에 부담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괜히 딴청을 피우며 침묵을 굳게 지켰다. 늦은 밤이라 인적도 없고 볼 것도 없는 창밖을 애써 주시하는 척했다. 지금껏 살면서 20분이 그토록 길게 느껴진 적도 별로 없었다. 그날따라 교통신호는 왜 그리 자주 걸리는 것인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러면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짚었다. 우리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비슷한 점도 많았다. 둘 다 아담한 체구에 숫기라곤 없이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는 멋없는 타입이었다. 그때도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면 학교 담장 너머 비원(秘苑)으로부터 꽃향기가 흘러들어왔고, 우리는 그 냄새를 맡으며 교실에서 밤늦게까지 책장을 넘겼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저 친구도 책갈피마다 스며들던 그 옛날의 꽃향기를 떠올리고 있을까?

이윽고 차는 한강을 지나 집 근처에 이르렀다. "여기서 좌회전…." "아니, 여기선 우회전인데…." 마지못해 짧게 길 안내를 해 준 끝에 차를 세웠다. 약간의 웃돈을 얹은 대리운전비를 손에 쥐여 주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파이팅이야. 언제 한번 다시 보자고…." 그런 '기약 없는 만남'을 다짐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그날 밤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 만남이 바늘방석 같다는 생각만 했지, 그 친구에게 따뜻한 위로나 격려 한마디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게 아닌가. 나는 왜 통 큰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을까. '뭐, 기왕 이렇게 만난 거! 하하하.' 이렇게 호탕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학교 때 추억도 꺼내고, 그동안 살아온 인생 역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매라도 잡아끌고 어디 포장마차라도 가서 뜨거운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 기울였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나마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기 위해 불을 켜고 일어나 펜을 들었다.

'친구야! 아까는 내가 속이 넓지 못해 호탕하게 웃지도 못하고 속 시원히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했는데 네가 이해해 주렴. 이 추운 날, 지금도 누군가를 대신해 핸들을 잡고 있겠지만, 항상 꿈과 희망을 실어 나른다는 마음으로 수고해 주렴. 지금은 강추위에 찬바람까지 보태져 코끝을 시리게 하지만 곧 봄이 오지 않겠는가! 매화는 혹한과 눈을 많이 겪고 견뎌서 더 붉다고 하더라. 또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 추운 겨울을 굳건히 이겨야 따뜻한 봄이 오는 날에 성공과 희망의 밀알을 심을 것이고, 또한 가을에 오곡백과를 듬뿍 수확할 수 있을 테니까 늘 웃으면서 밤길 조심하며 수고하기 바란다, 친구야.'

작고한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인 중 한 분은 "매일같이 '쨍 하고 해 뜰 날'이란 노래를 흥얼거렸더니 어느 날 정말 쨍 하고 해가 떴다"고 즐겨 말했다고 한다. 내 친구에게도 쨍 하고 해 뜰 날이 올 것을 믿고 싶다. 혹 그 친구에게 해가 조금 더디게 '쨍' 하더라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정말 쨍 하고 해가 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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