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쓰여진 배경- 박찬승(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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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쓰여진 배경-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의 하나로 꼽힌다. 이 시는 1926년 잡지 <개벽> 6월호(통권 제70호)에 실린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시가 매우 불온하다고 보아 6월 3일 <개벽> 6월호에 대해 압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경찰이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 구내에 있던 개벽사에 들어가 6월호를 모두 압수해갔다. 이때는 바로 순종 인산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순종은 4월 25일 서거하였고, 이상화는 그 직후에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순종이 서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모여 통곡을 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많은 이들이 봉도식을 올렸다. 이상화의 고향 대구에서도 5월 1일 달성공원에서 포목상조합, 객주조합, 미곡상조합 등이 개최한 봉도식이 열렸는데, 2만여 명이 흰 상복을 입고 참여했으며 식장은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화는 당시 서울 가회동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의 시가 실린 <개벽> 6월호가 압수된 지 사흘 뒤인 6월 6일 경찰은 천도교당 구내에 다량의 불온한 격문이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6일 오후 4시 반 수십 명의 경찰을 보내, 천도교당 구내 개벽사 등을 수색하여 개벽사의 제본소 역할을 하던 손재기(손병희의 종손)의 집에서 격문 5만2천매를 찾아내 압수했다. 이 격문은 권오설이 박래원에게 부탁하여 박래원이 인쇄공 4명과 함께 일주일에 걸쳐 만들어 이곳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래원은 이날 경찰이 돌아간 뒤에 경찰의 압수수색 사실도 모르고 천도교당에 들어왔다가 잠복근무 중이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박래원은 종로경찰서에 붙들려가 밤새 취조를 당한 끝에 이튿날 아침 10시 권오설의 이름과 그의 소재지를 실토했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준비를 총책임을 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권오설을 종로구 장사동에서 체포했다. 현재 종로 4가의 뒷골목에 그의 아지트가 있었던 것이다.
대구 출신 이상화(1901년생)는 1915년 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1918년 봄 중퇴했다. 안동 출신 권오설(1897년생)은 대구고보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와 1917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중퇴하였다. 두 사람은 아마도 중앙학교 시절에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초 권오설이 이상화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엽서가 최근 발견되었는데, 이를 보면 "그동안 너무 오래 적조했습니다. 아우는 산골의 무지렁이 노릇으로 밥만 축내고 있습니다. 27,8일경 대구에 구경 나갈 듯하니 그때 많은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두 사람이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화의 시는 <개벽>에 압수되는 바람에 그 주위의 사람들 외에 일반인들은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그와 가까운 시인들은 보았을 것이다. 이 시는 언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까. 1951년 대구 출신 시인 백기만은 자신의 친구인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를 모아서 <尙火와 古月>이라는 시집을 냈다. 이장희(1900년생)는 역시 대구 출신 시인으로 "봄은 고양이로다"라는 시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의 유지로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이었다. 때문에 이장희는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고, 결국 1929년 스스로 세상과 결별했다. 이상화는 1927년 이후 대구에 살았는데, 194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화, 이장희의 유고 시들을 모아 출판한 백기만(1902년생)은 대구고보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 당시 이상화 등과 함께 학생들을 모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6월, 2심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았다. 이상화는 자신의 친구만 붙들려 간 것에 몹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1920년대 초 집을 떠나 만주에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1977년 정부로부터 독립장을 받았다. 이상화는 1937년 중국에 있던 형을 만나러 3개월간 중국에 다녀왔는데, 이 일로 경찰에 붙들려가 구금되어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이 일로 그는 건강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이상화는 3.1운동 참여, 항일시 발표, 카프 참여, 경찰에 2개월 구금 등으로 1990년 애족장을 받았다. 백기만은 아직 포상받지 못했다.
<상화와 고월> 시집이 나온 뒤, 이상화의 "빼앗긴들---"은 널리 알려졌고, 교과서에도 실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가 되었다. 다만 그 시가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가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 1926년 봄 순종이 서거하고 전국이 슬픔과 탄식, 분노로 들끓던 시기, 그의 친구 권오설이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느라 동분서주, 고군분투하던 그해 5월에 이상화는 서울의 북촌에서 이 시를 썼던 것이다.
ㅡ 2026.5.7. 페북에 올린 글입니다.


